경제부총리가 은행장과 공 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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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 중앙부처 공무원 K씨는 다음 주말로 예정했던 골프 모임을 취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날 갑자기 공직자가 직무 관련자와 골프를 칠 수 없도록 행동강령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K씨는 "인척이 주선한 모임이지만 누가 함께 올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은 "업무를 맡은 분야 사람들을 만나 현안을 파악하고 애로사항을 듣는 것도 중요한 일인데 어쩌란 말이냐"고 되물었다. 경제부처의 한 과장은 "친구가 다니는 회사가 공사를 수주했는지, 무슨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일이 확인하란 말이냐"며 "결국은 골프를 치지 말라는 얘기지…"하고 한숨지었다.

국가청렴위원회가 23일 내놓은 '골프 및 사행성 오락 관련 공직자 행위기준 지침'을 두고 공직사회에 논란이 일고 있다.

청렴위 지침의 요지는 모든 공직자가 직무 관련자와 골프를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직무 관련자와의 마작.화투.카드 등도 금지했다. 지금까지 공무원 행동강령은 '접대골프'만 금지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본인이 자기 비용을 내더라도 동석자 중 직무 관련자가 있으면 징계를 받게 됐다. 이날 청렴위에는 언론은 물론 각 기관들의 문의 전화로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공직자들의 관심이 높았다.

우선 직무 관련자가 누구냐는 문제 제기가 많았다. 공무원 행동강령에는 직무 관련자에 대한 정의가 구체적으로 규정(표 참조)돼 있다. 그러나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직무 관련자 범위가 넓어지는데 이에 대한 규정이 분명치 않다. 국무총리 직속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는 영남제분 회장과 골프를 쳤던 이해찬 전 총리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청렴위 권근상 행동강령 팀장은 "부하 직원의 직무 관련자는 상사와 직무 관련이 있다는 것이 원칙"이라며 "그러나 직무 범위는 기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교육부총리는 학교 관계자와, 경제부총리는 은행 관계자와 골프를 치면 안 되느냐는 질문엔 "꼭 그런 것은 아니다"며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금지는 했지만 지켜지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A건설사의 한 임원은 "공무원들은 골프장에서 본명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고 본인의 차를 타고 가는 경우도 별로 없다"고 전했다. 그는 "골프장이 가까운 분당의 모 건물 주차장은 주말이면 일행의 차로 옮겨타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덧붙였다. 민원인과 골프를 하더라도 잡아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청렴위 측은 "공직자들은 더욱 몸조심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달라"고 말했다.

형평성 논란도 있다. 행동강령상 정무직과 선출직은 징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렴위 권 팀장은 "정무직과 선출직은 사퇴가 가장 큰 징계지만 사퇴를 거부할 경우에 대해선 뾰족한 제재 수단이 없다"고 밝혔다. 감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공무원은 "총리나 시장은 징계하지 못하면서 일반 공무원들만 괴롭히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청렴위는 "공무원들끼리는 직무 관련성이 있어도 비용을 상급자가 내거나 각자 부담하면 함께 골프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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