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당 체제…처신 고민하는「전경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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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나라 경제를 이끌어 가는 재계 중진들의 모임인 전국 경제인연합회가 4당 정치체제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다.
사실상 정부나 집권여당 한쪽만을 의식하고 처신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되어있다. 그럴 경우 거센 외풍이 불어닥칠 것이고 그 외풍을 막아줄 방패가 없게된 것이다. 그래서 전경련은 새로운 입지와 처신을 모색, 이미 내부적으로는 적잖은 변화가 일고 있다.
최근 잇달아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의는『야권과 통로를 닫아 놓은채 여권만을 상대하는 방식으로는 재계가 더 이상 버텨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의 경단련과 같은 대 정치권 다 채널 로비통로를 개설키로 의견을 모았다.
전경련은 우선 조규하 전무를 곧 일본에 파견, 여야 틈바구니에서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들의「비법」을 알아올 예정이다.
경단련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려 드는 사회당과 공산당만을 제외한 집권 자민당을 비롯, 공명당·민사당 등 보수 야당을 상대로 두루두루 강력한 로비활동을 펴고있다.
전경련도 경단련과 마찬가지로 보수를 지향하는 모든 야당과 관계를 개선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구자경 회장은『총선후 평민당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민주당·공화당과 함께 평민당도 관계개선의 대상임을 강력 시사했다. 현실적으로 평소 아무리 재계에 대해 강성발언을 했어도 기본적으로 현재의 경제체제를 인정하고 있고 더구나 제1야당이 된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된 것이다.
야권과의 관계 개선은 대화통로의 개설과 정치자금의 배분으로 나타나게 된다.
재계인사들이 야당 지도자를 만나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기업의 공과를 설명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리한 각종 법률제정이나 기존 법률의 개정을 막는 한편 양성적으로 정치자금을 나눠주는 전혀 낯선 장면이 나타날 것도 충분히 짐작된다.
특히 대화 채널은 60년대 초반 김용완 당시 회장이 정경 간담회를 운영, 야당정책 위원회의장과 자리를 같이한 경험이 있어 재계로서는 생소하지만은 않다.
정치자금 역시 63년 총선 당시 전경련의 전신인 경제인 협회가 주축으로 공개리에 8천만원을 각출, 7대3의 비율로 여야에 분배한 것을 시작으로 65년2월「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이 제정된 이후 70년대까지 모두 열다섯번에 걸쳐 9억6천2백여만원을 거뒀고 80년대에도 50억원 이상을 정치권에 나눠준 바 있다.
다만 여권의 권유에 의해 이제까지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던 정치자금 모금이 63년과 같은 자발적인 형태로 바뀌고, 또한 야권에 대한 기업별 음성적 지원을 전경련을 통한 양성적 단일화로 전환한다는 생각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유신」이후 정치권력의 의도가 기업의 사활과 직결돼 왔고 현재도 그 위력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재계의 대야접촉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개헌 협상 때 근로자의 경영권 참여를 헌법조항에 넣으려는 야당에 로비활동을 나섰던 인사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은 일도 있었다는 것.
현실적으로 재계의 야권접촉은 묵시적이든, 현시적이든 여권의 양해없이는 불가능한 실정으로 봐야한다.
전경련은 여러 채널을 통해 『여권이 재계의 입장을 전적으로 보호해주지 못할 형편이라면 차라리 대야 접촉을 인정해 줄 것』을 요망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재계 일각에서는 정치와의 수직적 관계를 차제에 수평적 관계로 변혁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정치권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재계의 독립」이 긴요하다는 것.
정부가 세제와 금융의 무기를 사용, 경제활동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재계의 운신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전경련은 세제 개혁안을 마련한데 이어 명실상부한 민영화를 골자로 한 금융제도 개편안을 빠른 시일내에 마련, 정부에 건의할 방침이다.
어쨌든 새로운 정치 환경에 적응하려는 재계의 움직임으로 전경련은 모습이 바뀌어 가고 있어 이에 따라 활동영역도 더욱 넓어질 전망이다. <한종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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