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백남준은 한숨 짓지 않았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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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하지만 현장은 기쁨보다 증오와 반목과 슬픔이 우울하게 뒤덮인 곳으로 변했다. 이날 행사를 이끈 이는 백남준의 장조카인 켄 백 하쿠다(55)다. 그는 자신이 백남준의 '유언집행인'이며 고인 예술작품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홍보자료에서 "백선생이 비양심적인 미술 상인들과 화랑에게 이용당하는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뉴욕 '백 스튜디오'와 국내 미술계 사이에서 터져 나온 온갖 잡음의 근원지가 자신임을 드러낸 셈이었다.

켄은 삼촌의 추모제를 주관한 장조카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발언을 계속해 참가자를 놀라게 했다. 어렵게 추모제에 온 백남준의 일본인 부인 구보타 시게코를 "모든 문제의 발단" 이라 몰아붙였다. 백남준의 주요 작품과 자료를 소장하고 미술관 건립을 준비 중인 경기문화재단과 "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백남준의 작품을 다룬 화랑과 개인 이름을 들며 "그들이 우리를 속였으니 다시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화를 냈다.

켄은 백남준 유골의 귀향과 유작 '엄마'의 공개에 이은 49재 행사까지 연일 언론을 타며 하루하루 자신과 백남준을 국내에 인지시킬 해프닝과 기자회견 마련에 능한 솜씨를 발휘했다. '경기문화재단이 백남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국내 화랑이 삼촌을 돈벌이에 내몰았다'던 그 자신이 가장 정치적인 행동과 계산된 마케팅 전략을 쓴 것은 아닌지 의심 가는 대목이다. 앞으로 백남준의 모든 작품 저작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켄의 주장이 맞다면 더 그렇다.

굿판을 이끌던 무속인 이비나씨는 백남준의 넋을 받아들인 뒤 켄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49재가 이 지경이 됐으니 백남준이 저승 길목에서 울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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