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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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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키 1m75㎝, 몸무게 77㎏의 동양에서 온 작은 거인'. 일본 야구의 상징이자 대표팀 간판스타인 스즈키 이치로(33)선수다. 2001년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 후 그의 통산 타율은 무려 0.332다. 2004년에는 262개의 안타를 쳐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 신기록을 세웠다. 1920년 이후 깨지지 않던 기록을 84년 만에 갈아치운 것이다. 일본 야구사를 새로 쓰고 있는 일본의 자존심이다. 일본인들은 이치로를 '야구의 신(神)'으로 부른다. "첨단 과학시설로 만들어 낸 야구 머신"이라고도 한다. 그의 성공 비결은 빈틈없는 자기관리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 이후 남들보다 두세 배 이상의 연습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 자신과의 약속을 깬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남한테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라고 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다. 타석에 들어서면 마치 칼을 휘두르듯 방망이를 가다듬는 모습을 취해 과거 일본의 '사무라이(武士)'에 비유되곤 했다. 그만큼 과묵하고 신중했다.

그 때문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메이저리그 입성 땐 "나에게 한계는 없다. 그것은 나약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에 불과하다"며 각오를 다졌다. 다짐대로 그는 불과 4년 만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다. '야구장을 캔버스로 만든 예술가'란 얘기를 듣기에 충분했다. "타석에 들어가는 것이 좋고 기다려졌다. 부담은 없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며 자신의 대기록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일본의 출판사들은 초등학생 교과서에 '이치로의 끝없는 꿈'을 싣기도 했다.

그런 이치로가 유독 한국전과 관련해선 튀는 말을 남겼다. 한.일 수퍼게임이 열렸던 1997년에는 "공에서 마늘 냄새가 실려와 어지럽다. 공을 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을 앞두곤 "한국 야구가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16일 한국에 패배한 뒤엔 "나의 야구 인생 중 가장 굴욕스러운 날"이라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욕설과 함께 펜스를 걷어차는 '사무라이 이치로'의 모습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절대강자의 망가진 표정에 시민들이 모처럼 통쾌해하고 있다. 박찬호에게 엉덩이를 차이는 '이치로의 굴욕'이란 제목의 합성 사진이 인터넷에선 최고의 인기다. 굴욕이란 단어에 담긴 이중성이 명확하게 드러난 장면이다.

박재현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