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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에 곁 내준 동네수퍼 ‘적과의 동침’ 웃음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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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호 14면

안성맞춤시장엔 상생이 있다

입구를 마주하고 있는 이마트 노브랜드 안성시장점과 화인마트. 소비자가 자연스레 양쪽을 오간다. 오른쪽이 화인마트, 왼쪽이 노브랜드다. 신인섭 기자

입구를 마주하고 있는 이마트 노브랜드 안성시장점과 화인마트. 소비자가 자연스레 양쪽을 오간다. 오른쪽이 화인마트, 왼쪽이 노브랜드다. 신인섭 기자

18일 경기도 안성시 서인동의 안성맞춤시장 지하 1층. 지하로 내려서자 독특한 구조가 눈에 띄었다. 수퍼마켓 두 곳의 출입구가 마주보듯 맞닿아 있어서다. 한 곳은 지역 유통업체인 화인마트이고, 바로 맞은 편의 수퍼는 이마트가 운영하는 초저가 할인매장(하드디스카운트 스토어)인 노브랜드 안성시장점(이하 노브랜드)이다.

서로 마주 보는 화인마트·노브랜드 #이마트 노브랜드 작년 입점하자 #하루 300명 찾던 동네수퍼 활기 #젊은 손님 더 늘어 요즘은 500명 #직원들끼리 함께 어울려 식사 #전통시장엔 장애인 일자리도 마련

두 매장 출입구 간 거리는 채 3m가 되지 않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 지역 유통업체와 대형마트 관련 점포가 갈등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매장 사이에는 별다른 긴장감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비자들은 쇼핑카트를 밀며 자연스레 두 매장 사이를 오갔다. 하정호(38) 화인마트 대표는 “노브랜드 매장은 과거 우리 마트에서 쓰던 공간을 내줘서 들어오게 된 것”이라며 “우리는 경쟁관계가 아니라 공생하는 관계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노브랜드 매장이 이 자리에 문을 연건 지난해 8월의 일이다. 지역 유통업체 바로 앞에 노브랜드 매장을 내자는 아이디어는 전통시장 살리기에 골몰하던 안성시 공무원이 신세계그룹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됐다.

‘호랑이 불러들이는 것 아닌가’ 거부감도

안성맞춤시장은 한복·속옷·수선 등 의복 관련 점포들이 밀집한 시장이다. 한때 ‘그날 번 돈을 다 세지 못하고 잠이 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나가던 시장이었지만, 시장 현대화 사업에 실패하고 인터넷 쇼핑 등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화인마트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을 찾는 소비자가 줄면서 자연스레 마트까지 어려워졌다. 하 대표는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점포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자가 쌓이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화인마트 부근에 이마트 노브랜드 매장을 입점시키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시장 상인들과 화인마트 하 대표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가 이어졌다. 주변에서도 만류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게다가 화인마트가 기존에 쓰던 공간을 노브랜드에 내주는 식으로 입점이 이뤄지는 만큼 매장 규모를 줄이는 것도 부담이었다. 실제 노브랜드는 화인마트의 종전 영업면적(2310㎡) 가운데 3분의 1 가량인 693㎡를 쓰고 있다. 화인마트가 신선식품을 팔던 자리다. 동네마트 속으로 노브랜드가 들어간 셈이다. 동네마트 내에 입점한 대형마트 관련 점포는 노브랜드 안성시장점이 최초다. 하 대표와 시장 상인들이 노브랜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다음에는 빠르게 일이 진행됐다. 시장 상인들도 최근 급격하게 시장이 쇠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낀 터였다.

노브랜드 측도 상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상인들에게 ‘기존 파이를 빼앗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안성시는 상인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청회를 열었다. 이마트도 두 차례의 설명회를 열어 상인들의 동의를 구했다. 노브랜드를 정면으로 맞이하게 된 하 대표는 이마트 측과 50회 가까이 미팅을 가지며 서로의 입장을 조율했다. 덕분에 ‘안성시와 안성맞춤시장상인회, 화인마트와 이마트 4자간 양해각서(MOU)’가 체결됐고 그 결과물로 노브랜드 매장 입점이 성사됐다.

김원기 이마트 공정거래팀 파트너는 “경쟁이 아니라 상생을 위한 점포란 점을 상인들에게 집중적으로 설명했고, 실제 노브랜드 점포에서 이윤을 내기보다는 시장에 오는 소비자를 늘리는 쪽으로 영업전략을 짜고 있다”며 “노브랜드가 젊은 고객을 끌어들이는 집객효과가 있는 만큼 그 성과를 시장 상인들과 나누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실제 노브랜드는 시장 상인들과의 상생을 위해 전통시장 주력 상품인 신선식품을 비롯해 국산주류와 담배 등은 팔지 않는다. 대신 기존 전통시장에선 찾아보기 어려웠던 다양한 가공식품이나 인테리어 용품 등을 주력으로 판다.

노브랜드가 입점하면서 상품 종류도 더 다양해졌다. 화인마트는 종전 3000여 가지의 제품을 팔았지만, 여기에 노브랜드의 상품(1100여 가지)이 더해진 덕이다. 노브랜드는 화인마트 직원들을 대상으로 친절교육을 하고, 제품 진열 노하우 등을 전수했다. 칙칙하던 시장 지하 공간도 깔끔하게 단장했다. 또 화인마트 매장의 일부에 입점한 만큼 기존에 화인마트가 부담하던 보증금과 임차료의 절반 씩을 노브랜드 측에서 부담한다. 화인마트 입장에선 그만큼 고정비 부담을 덜게 됐다.

노브랜드 측은 시장에 오는 소비자를 늘리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더 뒀다. 대표적인 게 화인마트 맞은 편 공간에 만든 ‘희망장난감 놀이터’다. 이곳은 젊은 엄마들이 장을 보는 사이에 아이를 맡기도록 한 공간이다. 이마트 측에서 놀이터 운영비도 일부 부담한다. 안성맞춤시장이나 화인마트, 노브랜드 등에서 1만원 어치 이상 장을 본 소비자들에게는 이용료 할인 혜택도 준다. 최근 희망장난감 놀이터의 하루 이용객은 40여 가족에 이른다. 김도영(38) 안성맞춤전통시장 협력회장은 “전통시장에 젊은 엄마와 아이들이 늘면서 활기가 생겼다”고 반겼다. 또 놀이터 옆에는 쇼핑 중 쉬어갈 수 있는 카페테리아(디딤카페)를 설치했다. 놀이터와 카페테리아 운영은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만들어진 디딤사회적협동조합이 맡았다. 노브랜드가 입점한 덕에 장애인과 그 가족의 일자리 10여개가 늘어난 셈이다.

20~40대, 노브랜드 들어서자 40% 늘어

안성맞춤시장 내에는 청년 상인이 낸 카페(왼쪽)와 기존 상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등이 공존한다.

안성맞춤시장 내에는 청년 상인이 낸 카페(왼쪽)와 기존 상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등이 공존한다.

‘적과의 동거’가 시작된 지 반년여가 지난 현재까지 결과는 만족스럽다. 우선 하루 평균 300명을 밑돌던 화인마트 방문객 수가 현재는 500명 선으로 증가했다. 특히 전체 방문객 중 20~40대 젊은 손님의 비중이 노브랜드 입점 전보다 30~40% 가량 늘었다. 시장 전체로도 젊은 손님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이날 시장에서 만난 주부 김수현(42)씨는 “전에는 칙칙한 느낌이 들어서 마트에 가는 게 꺼려졌는데 요즘은 밝고 깔끔해진데다, 물건도 다양해져서 산책삼아 시장에 나오는 일이 늘었다”고 말했다. 노브랜드 측도 많은 이익을 내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영업수지를 맞춰가고 있다. 당초 우려했던 노브랜드와 화인마트 간 갈등은 불거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사 시간이면 노브랜드 직원(6명)이 화인마트의 직원 식당에서 자연스레 함께 식사를 한다.

이들의 성공적인 동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벤치마킹을 하러 오는 다른 지역 전통시장 관계자도 많다. 최근엔 강원도 삼척시청과 용인 중앙시장, 서울 경동시장 관계자 등이 이곳을 둘러봤다. 정동혁 이마트 CSR담당 상무는 “노브랜드 상생스토어처럼 전통시장과 이마트가 같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상생모델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가겠다”며 “보여주기식 상생이 아니라 실제로 상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성=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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