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졸병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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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해묵은 악습과 권위주의 정치가 낳은 폐습중의 하나가 학생동원이다.
뻔질난 행사나 대회때마다 예외 없이 동원되는게 학생이고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분의 나들이에는 태극기, 플래카드를 들고 연도에 늘어선 동원행렬을 수없이 보아왔다.
이럴 때는 연도 주변의 가게에 페인트가 칠해지고 집 단장과 포장마차, 잡상인들이 철거되곤 했다.
학생과 시민동원은 바로 며칠전정부가 이양되던 날에도 사전에 통·반장을 통해 은밀히 계획되었다가 물의가 일자 취소되기도 했다.
행정이 걸핏하면 학생과 시민을 동원하는 작태는 한마디로 국민을 졸병시하는 정치문화에서 비롯된다.
나오라면 나오고 들어가라면 아무 말 않고 퇴장해야 하는, 국민을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된다는 의식과 풍토가 아니고서야 이런 발상을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생활이 침해되고, 교육을 받을 권리가 박탈되고, 인격과 인간의 자존심까지 상하게 하는 강제동원이 가능하겠는가. 그보다 더 개탄스러운 것은 그같은 비인간적이고 국민을 도구처럼 여기는 강제동원이 행정기관장의 점수 따기와 과잉충성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더욱더 한심한 것은 권력자가 강제동원이 나쁜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은근히 흡족해했다는 점이다. 제5공화국 출범전이나 그 후에도 학생동원을 않겠다는 다짐과 약속이 얼마나 거듭되었는가. 그런데도 동원계획은 여전히 이행되었고 어쩌다 무리한 동원이 말썽이 되어도 해당 행정기관장의 목이 달아나기는커녕 오히려 잘 되어가는게 비일비재했다.
국민을 위한 행정보다 행사를 일사불란하게 잘 치르고 많은 시민과 학생을 동원시켜 어느 한사람을 흐뭇하게 하는 관료가 유능한 공무원이고 성실한 기관장이었다. 공직사회의 평가기준이 이런 판이었으니 동원행정이 어찌 경쟁적으로 벌어지지 않았겠는가.
동원이 얼마나 잦았던가는 문교부 집계가 잘 말해주고 있다. 86년 한햇동안만도 지방중학교의 학생동원이 40회나 되었다. 자그마치 9일에 한번 꼴이었다. 이중에 58%가 교육계획과는 무관한 행사동원이었으니 학생들이 얼마나 시달리고 심사가 뒤틀리고 마음속깊이 저항적, 부정적 심성이 심어졌을지 심히 걱정스럽다.
조작된 민의, 가공된 민의는 이제자취를 감추어야 한다. 강제된 민의는 몇몇 사람을 즐겁게 해줄지도 모르고 어느 한사람의 권위를 높여 줄듯 하지만 그 민의로 얻어진 권위는 모래 위의 성처럼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원성을 남길 뿐이다.
학생동원을 않겠다는 이번 약속은 여하한 경우에도 지켰으면 한다. 88올림픽 행사때 학생동원이 불가피하겠지만 자원봉사나 아르바이트학생을 활용해서라도 「강제」라는 말이 다시는 떠오르지 않게 하길 바란다. 모든 행사가 그러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자연스러워야하며 축제처럼 모든 사람이 즐겨서 참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게 바람직하다. 규격화된 행사, 딱딱하고 굳어있는 강제된 행사는 후진성을 못 벗어난 촌스런 나라에서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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