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되어 돌아온 '오빠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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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전국의 십대 소녀들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했던 '비련'의 익숙한 전주와 도발적인 첫 주제가 터져 나왔을 때 잠실벌은 순식간에 가수왕 조용필의 마법에 걸려들었다.

공연 내내 줄기차게 쏟아졌던 비는 공들여 준비한 많은 무대 장치를 불구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데뷔 35주년을 맞은 이 작은 거인의 기백과 이에 호응하는 4만5천여 관객의 경외심까지는 위협하지 못했다.

폭우 속에서도 하얀 우비를 입고 경기장 스탠드와 경기장 바닥을 가득 메운 풍경은 그 자체로서도 감동적이었고, 여의도의 트윈 타워 빌딩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조명 조형물은 '역사(The History)'라고 명명된 이 공연을 장엄하게 굽어 보았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여기가 어떤 곳이던가? 마이클 잭슨의 두 차례 공연과 리키 마틴의 공연은 물론 90년대의 서태지의 페스티벌마저 매진을 허락하지 않았던 악몽의 공연장이다.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경기장이 십대들의 아우성이 아닌 70년대와 80, 90년대를 관통해온 중년의 아줌마.아저씨들의 신음에 가까운 탄식으로 매진되었다는 것은 조용필의 권능을 확인해 주는 것과 동시에 반짝 인기에 몸부림치다 스스로 몰락해가는 당대의 음악 우상들에게 푸르스름한 진검의 음악적 카리스마를 일깨워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조용필의 공연이 언제나 그렇듯, 이번 공연도 백m가 넘는 무대 규모를 제외하면 음악 그 자체의 장인의 혼으로 점철된다는 점에서 여느 그의 공연과 다를 바 없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이르기까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연주는 오케스트라의 진원까지 등에 업고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정련된 면모를 보였다. 다만 우천으로 인한 기술적인 장애로 중후반부의 몇몇 대목에서 기우뚱한 대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곧 발매를 앞두고 있는 5년 만의 신작 18집의 노래들, 가령 반음계적인 화려함이 돋보이는 '태양의 눈'과 타계한 아내를 기리는 '진'(珍) 등이 소개된 것은 이번 공연의 작은 팁. 야속한 비는 하늘의 뜻이겠지만 삼십오년을 연금한 지상의 집념은 오빠부대의 전설을 하나의 역사로 새겨놓은 순간이었다.

강헌.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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