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의광고로보는세상] 올 월드컵 카피는 뭘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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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새 당의장을 뽑았다. 보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치러진 이 행사가 당초 그들의 기대만큼 흥행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이제 정치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행위에서 이벤트가 없으면 심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가 보다. 하다못해 목욕탕에 가도 '이벤트 탕'이라는 게 있을 정도니까.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열광할 수 있는 이벤트라면 역시 올림픽이 아닐까. 애틀랜타 올림픽이 있었던 1996년 여름, 도쿄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한 여학생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이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 그러니 방학인데 집에 내려오지 않느냐는 부모의 전화에도 짜증이 난다.

말단 회사원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며 바쁘게 걷고 있다. 영업직인 듯한 이 사내는 유능한 사원 같지는 않다. 공중전화로 회사의 상사에게 보고하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한다. 길을 걸을 때도 꼭 사람들과 부딪치는데 역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되풀이한다.

마침내 이 피곤에 찌들고 보잘것없었던 하루가 저물고 사내는 허기를 달래며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여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식당에는 사내 외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다.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데 마침 식당의 TV에서 올림픽 수영 경기를 중계하고 있다. 흥분한 아나운서의 음성, 1위로 앞서는 일본 선수…. 초점 잃은 눈으로 반쯤 식탁에 엎드려 있던 사내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방 앞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여학생도 TV 화면으로 자연히 눈길이 간다.

일본 선수가 1위로 들어오는 순간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좋았어!"하고 크게 외친다. 깜짝 놀란 여학생이 뒤돌아본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잠시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가 둘의 얼굴에 약속이나 한 듯 미소가 번진다. 아마 그날 이들이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으리라. 그리고 카피가 등장한다. "올림픽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여름이었습니다." 일본 민방 123개 사의 합동 올림픽 중계 광고 내용이다.

우리의 올 여름은 4년 전이 그랬듯이 월드컵으로 달아오를 것이다. 광고계도 이른바 월드컵 특수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월드컵만이 국민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대한민국이 아니었으면 싶다. "월드컵이 없었더라도 신나는 여름이었습니다"가 될 수 있도록 국가가 경영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동완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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