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떼러 갔다 더 붙이고 온 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정인용부총리의 방미협상>
정인용부총리의 이번 미국방문은 혹 떼러 갔다가 오히려 혹을 더 붙이고 온 느낌이다.
미국측과의 협상이 끝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부총리는『협상은 아직 진행중이며 한미양측은 이번 협상결과 합의된 사항은 아무것도 발표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다만『오해로 인한 돌발사태가 당장 일어나는 일은 막았다』고만 말했다.
이 말대로라면 합의된 것은 없으나 당장 발등의 불이 되고있던 미통상법301조의 발동은 막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6일 밤 김포공항에 도착, 기자회견을 가진 정부총리는 미국측에 『어떤 약속을 해 준 것은 없으나 미국측의 요구가 너무 엄청나고 강력해 사태의 심각성을 그대로 전하고 우리정부의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일정을 단축해 귀국했다』고 고백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국의 요구보따리만 잔뜩 짊어지고 왔음을 시인했다.
워싱턴에서 날아온 보도에 따르면 정부총리가 개방시기를 늦춰달라고 사정한데 대해 미국측은 그 댓가로 무려 5가지의 추가 요구사항을 더 내놓고 그 대답을 19일까지 통보해 달라고 시한까지 못박았다는 것이다.
미국측이 추가로 내놓은 요구사항은 ▲쇠고기 수입대상을 관광호텔용에서 일반 관광시설로까지 확대할 것 ▲오는11월말까지는 일반쇠고기 수입을 허용할 것▲이미 수입을 허용한 알팔파사료의 수입쿼터물량을 늘려줄 것 ▲냉동감자·사과·오렌지·포도 등 과일과 과일통조림 등의 수입을 자유화하고▲농산물수입관세율을 절반정도 낮추어 줄 것 등이라는 것.
당초 한-미간의 현안은 ①보험합작업체의 규제대상범위를 국내 30대기업군에서 10대기업군으로 축소하고 ②담배값을 7백원선으로 낮추며 ③관광호텔용 쇠고기수입을 즉각 개방하라는 3개항목으로 좁혀진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리고 한-미간에는 이미 지난해 6월 이같은·3개현안을 지난 연말까지 미국측의 요구대로 들어준다는 내부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총리의 이번 미국방문은 이같은 당초의 약속이행이 국내 정치사정때문에 늦어질 수 밖에 없게된 사정을 설명하고 미국이 위협하는 301조 발동을 뒤로 늦추자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측은 경제정책의 최고 책임자가 직접 찾아온 기회에 얼씨구나 하고 301조 발동을 다소 늦추어주어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시켜주는 대신 이것저것 요구조건을 추가로 내놓아 우리정부를 오히려 더 궁지에 몰아넣은 셈이다.
총선을 앞두고 축산농가의 신경을 건드릴 쇠고기 수입문제에 정부가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는 사건은 이해하지만 이제 미국이 일반 쇠고기 수입개방까지 들고 나오게 된 만큼 과연 어느 쪽이 농민을 위한 길이었는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앞으로 정부는 미국의 무역보복을 각오하든가 쇠고기시장을 개방하든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됐다.
이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무역적자증가와 우리의 대미흑자가 1백억달러에 달한다는 기본구조상의 문제가 있지만 우리의 대외통상정책에도 적지 않은 헛점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부총리가 직접 갔어야 했느냐는 점이다.
현재 우리의 대외통상협상조직은 경제기획원의 대외경제조정실이 내부조정을 담당하고 직접 협상창구는 각 부처가 맡는 것으로 돼 있다.
부총리의 이번 미국행은 정부내의 이같은 역할분담체체를 무시하고 부총리가 직접 협상창구로 일선에 나서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정부총리의 방미에서 드러난 또 다른 문제는 정부내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뚜렷한 정책방향도 세우지 못한 채 우선 급한 불을 끄러갔다가 오히려 당하는 결과를 빚었다는 것.
앞으로 대미뿐 아니라 대EC·대일본 등 통상마찰이 갈수록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우리의 대외통상창구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반드시 정리돼야 할 과제로 등장하게된 셈이다.

<신성순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