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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와 하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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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투자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다. 전설적 고수가 널렸다는 월가(街). 그중 최고수는 단연 워런 버핏(75)이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19일(현지시간) 4000여 명에게 물어봤더니 44%가 버핏을 '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꼽았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넉넉한 점심을 살 만큼 많은 돈을 갖고도 빌 게이츠는 8위에 그쳤다.

버핏은 1956년 첫 투자조합을 만든 뒤 50년간 연평균 약 28%의 수익을 올렸다. 당시 그가 투자한 14만 달러는 지난해 440억 달러로 불어났다. 엄청난 성과지만 그가 최고수 자리에 오른 것은 불린 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눈앞의 돈만 좇는 다른 투자자들과는 달랐다. 좋은 주식을 골라 오래 보유했다.

장기.가치투자로 불리는 이런 투자철학은 오랜 실전과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5세 때 집앞에 가판대를 차려놓고 껌을 팔았다. 주식을 처음 산 것은 11세 때다. 3주를 주당 38달러에 샀는데, 사자마자 27달러로 떨어졌다. 주가가 다시 오르자 5달러의 이득을 보고는 팔아치웠다. 그러나 이 주식은 얼마 뒤 200달러까지 올랐다. '장기 투자'의 교훈을 배운 것이 이때다. 그는 이때의 교훈을 잊지 않고 65년 19달러에 사들인 버크셔해서웨이 주식을 한 주도 팔지 않고 갖고 있다. 이 주식은 현재 약 9만 달러로 4700배 넘게 올랐다.

흔히 버핏의 성공만 부러워하지 이면에 깔린 지독한 절약과 성실함은 외면한다. 그는 58년 3만1500달러를 주고 산 집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그간 늘어난 것이라고는 방 몇 개와 라켓볼 코트 정도가 전부다. 여전히 맥도널드 식사를 즐기고, 가장 싼 음료수를 찾아 전 오마하를 뒤지고 다닌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오마하의 현인'이다.

버핏은 투기꾼과 투자가를 분명히 갈랐다. 기업의 앞날에 관심을 가지면 투자가로, 주가에만 관심을 가지면 투기꾼으로 봤다. 투기꾼은 돈은 벌지 모르지만 결코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하수로 취급했다.

월가의 전형적인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은 버핏과는 다르다. 얼마 전 KT&G 주식을 사들여 경영간섭에 나서는 바람에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탔다. 지배구조가 약한 기업, 돈 되는 기업만 노린다. 한번 물리면 치명적이라고 별명도 '상어'다. 기업은 나 몰라라고 주가에만 관심이다. 버핏의 기준대로면 영락없는 투기꾼이요, 하수다. 그런 하수가 맘대로 쥐락펴락하는 게 한국 대표기업의 현주소다.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