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쏘며 쫓는 무장세력과 자동차 경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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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기자에게 전쟁터는 최고이자 최악의 취재 공간이다. 노트북 컴퓨터 하나로 전 세계에 전쟁의 비인간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곳이 전장이다. 동시에 생명의 위협 속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끊임없이 강요받는 곳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말까지 3년여간 자사의 바그다드 특파원으로 일한 여기자 파르나즈 파시히(사진)의 취재기를 2월 18일자에 두 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아시아판에는 20일에 실렸다.

이란계 미국인인 그가 이라크에 처음 들어간 것은 사담 후세인이 집권하던 2002년 10월. 파시히는 "당시만 해도 보호장비가 없는 일반 승용차와 서구식 복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이에 맞선 저항세력의 반격이 거세지면서다. 그는 "안전을 위해 3년간 여덟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며 "항상 전보다 훨씬 '요새' 같은 집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2004년 9월에는 바그다드 만수르 지역에 있던 그의 집 바로 앞에서 폭탄 차량이 터졌다.

파시히는 "인간의 살점과 금속 조각들이 비처럼 정원 위로 쏟아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문을 나섰다간 무장세력에 납치당할까 무서워 다음날이 돼서야 대피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취재 도중 화를 당할 뻔한 적도 많았다. 티크리트의 한 교량 앞에서는 "이교도를 죽이자"며 달려든 성난 군중에 차량이 포위당했다가 미군에 의해 구조됐다. 바그다드 북쪽 고속도로에서는 총을 쏘며 쫓아오는 무장세력 차량과 자동차 경주를 벌이기도 했다. 출국 직전까지도 경호업체가 "저항세력이 미국 여기자를 납치하려 한다는 첩보가 있다"고 알려와 긴장해야만 했다. 실제로 그가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질 캐럴 기자가 납치됐다.

미국의 가족들에게 파시히의 이라크 근무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지난 여름 약혼한 그의 여동생은 "언니가 내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약혼 선물은 이라크를 떠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는 통념과 달리 "여성이라는 점은 오히려 취재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통 의상으로 칭칭 감아 놓으면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란 것이다.

파시히는 지난해 말 바그다드 근무를 바치고 레바논의 베이루트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0년 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베이루트를 떠났던 외국 특파원들이 도시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다시 모여들고 있다"며 "언젠가는 이라크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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