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영웅 만들기' 영화 먹히는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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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을 비롯한 중국 각 지역 영화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무협영웅 영화 '곽원갑(元甲)'의 주인공 곽원갑은 실재 인물이다. 1970년대 아시아를 풍미했던 홍콩 쿵푸 스타 리샤오룽(李小龍)의 출세작 제목이기도 한 무술도장 '정무문(精武門)'의 창시자로 리가 주연했던 영화 속 진진(陳眞)이라는 인물의 스승이다.

1868년 톈진(天津)에서 출생한 곽원갑은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비종권이라는 무술로 1900년 상하이(上海)에서 중국인을 모욕한 러시아 격투기 선수를 물리친 일화로 유명하다. 당시 러시아 격투기 선수는 상하이 신문에 "나를 이길 수 있는 중국인은 없다"는 광고를 낸 뒤 중국인의 도전을 받겠다고 밝혔다.

곽원갑은 이에 도전장을 냈다. 러시아 선수는 당시 곽원갑의 명성을 듣고서는 시합을 포기했다는 게 중국 언론의 설명이다. 곽원갑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이런 방식으로 외국인을 혼내줬다. 실제 시합은 벌어지지 않았으며 외국 선수가 자발적으로 격투를 포기했다는 점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영화는 이를 모두 바꿨다. 모두 네 명의 외국 선수를 상대로 칼과 창 등 다양한 무술로 시합을 해 모두 꺾었다는 식으로 나온다. 곽원갑 본인은 싸움의 현장에서 처절하게 죽어갔으며 가족들도 모두 참살당해 후대가 끊어졌다는 식으로까지 이야기가 과장됐다.

곽원갑의 증손인 훠쯔정(自正)이 발끈했다. "과장을 해도 너무 심했다"는 얘기다. "멸문을 당해 후손이 끊어졌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냐"라는 항변이다. 그는 변호사를 고용해 정식으로 영화 제작진을 고발할 움직임이다. 증조부의 영웅화도 좋지만 역사적 사실이 지나치게 왜곡돼 후손의 정체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황비홍(黃飛鴻)'에서 보듯 중국 영화계는 민족영웅에 관심이 높다. 중국 사회가 아직 서방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시장성도 높다. 하지만 이번 '곽원갑'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사실을 왜곡해 주인공의 후손에게 항의를 받았다는 사실에 중국 언론들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단순한 민족영웅 만들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사회의 다양성을 지향하려는 때문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유광종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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