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를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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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모의 거리는 바쁘기만 하다. 캘린더를 겨드랑이에 낀 사람들, 선물꾸러미를 든 사람들,망년회장에 가는 발걸음이 부산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부산한 세모의 거리와는 달리 이맘 때면 더욱 썰렁하고 쓸쓸해 지는 곳이 있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수용하고 있는 양로원과 고아원이다. 올해는 선거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라서 더욱 찾는이의 발길이 뜸하다고 한다. 당국이 접수한 불우이웃돕기 성금액수도 작년의 20분의 1에 불과하다.
증권시장에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억원씩의 돈이 몰려들고 있다.
백화점의 매상이 30%나 늘어나고 있고, 대도시 호텔에서는 1인부 4만∼5만원씩 하는 호화 디너 쇼가 초만원으로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어찌된 영문일까. 선거때 그토록 지천하게 나돌던 돈뭉치들은 어디로 종적을 감추고 불우한 사람들의 가슴을 서글픔과 야속함으로 한숨 짓게 하는가.
최근 한 사회복지단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우한 이읏을 돕는데 상류층·부유층보다 일반 봉급생활자나 근로자가 더욱 적극적이며, 연령별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노년층 보다 그렇지 못한 20∼30대청·장년층이 더 많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잔칫집 담장 밖에서 거지 굶어 죽는다」는 말이있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일 수록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부처님 같은 자비와 예수님 같은 사랑을 걸핏하면 입에 올려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를 평소에는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명절이나 연말에만 반짝하는 온정의 발휘를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낯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해를 마무리하는 세모에서나마 그동안 못했던 불우이웃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마저 외면해서는 안되겠다. 내 배가 부를수록 남의 배고픔을 가슴아파하고 조금씩이라도 더불어 나눠갖겠다는 사고는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도리일 터이다.
우리가 그들의 불운과 고독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위로와 온정을 나눠갖는 배려와 정성은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잠시나마 녹여주는 순간은 될 것이다. 나보다 가난하고 나보다 외로운 사람을 돕는 일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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