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과 김정은의 악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금 동북아에서 가장 속 터지는 사람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무역전쟁이 예고돼 있고 다음달 18일 제19차 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치열한 권력투쟁을 앞두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골칫거리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시도 때도 없이 핵·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니 안팎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

시진핑, 미국과 국내문제로 속앓이 #김정은마저 핵·미사일 도발로 고민 더해 #대북 원유 중단·국경폐쇄 등 감행할 의사 없어 #중국은 북한 비핵화보다 정권 안정 선호 #2012년 총서기 등극 직후 김정은 미사일 쏴 #2013년 국가주석 취임 앞두고 제3차 핵실험 #두 사람의 악연은 덩샤오핑-김정일과 유사

김정은과 시진핑[출처 셔터스톡]

김정은과 시진핑[출처 셔터스톡]

시진핑은 김정은의 도발을 왜 멈추게 하지 못할까? 대북 송유관 중단과 국경 폐쇄라는 ‘회심의 카드’를 쥐고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다.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보다 북한 정권의 안정을 더 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북 송유관 중단과 국경 폐쇄는 확실히 북한의 급변 사태를 유발할 수 있는 파괴력이 있다.

시진핑은 ‘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용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시진핑인들 김정은이 뭐가 예뻐 보이겠는가? 중국은 2만2000km에 달하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4개국이나 되는 나라와 이웃하고 있다. 그 가운데 1949년 신중국이 건국한 이후 역대 지도자가 외교에서 가장 골치를 앓은 나라가 북한이다. 중국말로 ‘마판(麻煩:귀찮은)’인 나라다.

시진핑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있다. 그는 2012년 11월 중국의 ‘5대 황제’로 등극했다. 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것이다. 그리고 기분 좋게 중국과 이웃한 북한, 라오스, 베트남 등 사회주의 우호 3국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시진핑은 북한이 그해 12월 북·중 국경에 가까운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에서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북한이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 17일) 1주기가 되는 12월에 위성을 발사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리젠궈(李建國)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급히 평양으로 보냈다. 리 젠궈는 시진핑의 친서를 가져갔다. 그 친서에는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자제한다면 지금까지와 같이 우호국으로서의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원조는 원유 50만t· 식량 10만t· 비료 2000만 달러 어치를 말한다.

하지만 김정은은 “위성발사와 핵실험은 주권국가인 조선(북한)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필요하다면 할 것이다. 중국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에 리젠궈는 “그러면 우리 역시 우리의 국익을 고려해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북한은 그해 12월 12일 미사일을 발사했다.

김정은이 리젠궈에게 한 말은 1992년 4월 평양을 방문한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이 김일성에게 건넨 말과 비슷하다. 당시 양상쿤은 김일성에게 한·중 수교를 통보하기 위해 방북했다. 양상쿤은 “연내 한국과 국교를 맺을 것이다. 불가피한 선택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에 김일성은 “우리는 계속 사회주의 건설을 계속 할 것이다. 지금부터 곤란한 일이 있어도 우리는 자력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당한 수모를 김정은이 20년 만에 복수한 것이다.

양상쿤(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중국 국가주석이 1992년 4월 한중 수교 문제를 김일성에게 알려주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중앙포토]

양상쿤(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중국 국가주석이 1992년 4월 한중 수교 문제를 김일성에게 알려주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중앙포토]

시진핑과 김정은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 악연은 2013년 2월 더 깊어졌다. 이번에는 제3차 핵실험이었다. 한 달 뒤면 국가주석으로 등극하는데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그해 5월 김정은의 특사로 방문한 최용해 총정치국장은 시진핑을 어렵게 만났지만 ‘찬밥’ 취급을 받고 돌아갔다. 최용해는 김정은의 방중을 요청했지만 시진핑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49년 수교 이후 양국 정상이 만나지 못한 것은 시진핑-김정은이 처음이다.

이런 악연인데도 불구하고 시진핑은 도발을 일삼는 김정은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못 날리는 이유는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다. 속이 터지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서다. 중국은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탈북자가 최대 100만 명이 국경을 넘어 유입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들이 동북 3성에 유입됨으로써 중국이 떠안을 부담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처럼 참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의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1인당 하루에 10위안의 비용이 든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 달이면 3억 위안(한화 516억원)이 된다. 그리고 북·중 국경이 혼란스러워져 티벳 자치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면 중국 정부는 무척 곤란해진다.

덩샤오핑(鄧小平)도 시진핑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83년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이 덩샤오핑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르며 개혁개방 노선을 전면 부정한 적이 있었다. 이에 격노한 덩샤오핑은 “세상물정도 모르는 애송이 때문에 앞으로 중국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김정일은 한·중 수교 이후에도 덩샤오핑을 매도했다. 그는 “우리는 정신적인 원자탄인 주체사상과 물질적인 원자탄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 한·중 수교를 비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에서 두번째) 이 1983년 6월 후계자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해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과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조선중앙TV 캡처]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에서 두번째) 이 1983년 6월 후계자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해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과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조선중앙TV 캡처]

당시 김정일을 보면 지금의 김정은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 CIA는 여러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김정일의 성향을 분석했다. 그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은 편협하고 충동적인 정책 결정을 해 일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분도 자주 변하고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분노를 떠뜨린다고 했다. 부전자전이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