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겨울 포플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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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홍윤숙(1925~ ) '겨울 포플러' 부분

나는 몰라
한겨울 얼어붙은 눈밭에 서서
내가 왜 한 그루 포플러로 변신하는지.

내 나이 스무살 적 여린 가지에
분노처럼 돋아나던 푸른 잎사귀
바람에 귀 앓던 수만 개 잎사귀로 피어나는지

흥건히 아랫도리 눈밭에 빠뜨린 채
침묵하는 도시의 일각
가슴 목 등어리 난타하고
난타하고 등 돌리고 철수하는 바람
바람의 완강한 목덜미 보며
내가 왜 끝내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한겨울 얼어붙은 눈밭'이라는 현실인식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꿋꿋한 의지가 한 그루 포풀러 같은 시어로 드러나고 있다. 한여름에 웬 '겨울 포플러'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추운 눈밭에 아랫도리 빠뜨린 현실, 난타하고 등 돌리는 차가운 바람 앞에 우리는 모두 서있지 않는가. "나는 몰라"라고 짐짓 말하지만 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분노처럼 돋아나는 푸른 잎사귀처럼 시인은 잘 알고 있다. 한국 여성시의 앞 페이지에 이런 긴장을 유지하는 원로 시인이 있다는 것이 기쁘다.

문정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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