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전제-진정한 정치평화를 위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날씨마저 청명한 1987년 12월 16일. 국민은 「깨끗한 한 표」에 나라의 미래를 걸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다녀왔다. 국가의 운명이 오늘과 내일 이틀 간의 선거양상에 걸려있기 때문에 투표에 임하는 모두의 마음은 경허하면서도 긴장돼 있었다.
법정 선거운동 기간이 한 달이라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겐 너무나 길고도 지루했다. 빨리 선거의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국민의 기대와는 대조적으로 선거운동의 양상이 구태의연하고 후보들의 발언이 변화없이 반복된 탓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불안한 고비를 수없이 넘겨 왔다. 지역 감정의 대립이 폭력과 방화, 파괴를 가져왔다. 그 때문에 선거유세가 저지되거나 방해됐다. 이것은 국헌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흑색선전과 중상모략, 금전살포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이 모두가 법에서 벗어난 불공정 사례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국민은 「첫 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그런 불법, 탈법을 극복하고 오늘 함께 투표에 임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미 드러난 선거기간의 모든 불상사는 국민의 승리 속에 묻어버리자.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에만 집착하기보다는 오늘 이후의 사태를 주시하자.
오늘 우리가 당면한 초미의 과제는 선거를 유종의 미로 장식하는 일이다. 그것 없이는 평화적 정권교체나 민주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사회는 다시 어둠의 터널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대전제가 차질없이 성취돼야 한다.
첫째는 투·개표의 공명이다. 투표의 공명은 외부의 위협없이 유권자가 오직 자신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 기표할 때 성립된다. 그것은 비밀, 직접투표의 보장하에서만 가능하다. 대리투표나 공개투표는 절대 금물이다.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폭로한 매표, 대리투표는 모두 선거전술상의 한 때의 설전으로 끝나야 한다. 만약 한 건이라도 그런 불미한 사태가 발생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 선거과정 전체의 유효성을 위협하는 사태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표의 공정은 유권자가 기표한대로 계표되어 공표될 때 성립한다. 만약 과거처럼 개표 종사자들에 의해 계표에 부정이 따르고 발표에 조작이 개입하면 그 선거는 결코 유효할 수가 없다.
투·개표의 공정은 선거사무소 내외외 질서와 평화가 유지될 때 가능하다. 투·개표소 내부에서 불법이 행해지거나 그 외부에서 폭력과 소란이 발생할 때 투·개표의 긍정은 끝장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한다.
둘째의 전제는 선거결과에 대한 모든 후보와 정당, 국민의 승복이다. 어느 측이라도 선거결과에 불복하여 도전하고 나선다면 이번 선거는 중대한 불안과 변란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크다.
그러나 선거경과에 대한 승복은 투·개표의 엄정한 공명이 전제된다. 만의 하나 투·개표 과정에서 명백한 불법이 드러나면 누구든 그 선거를 부인하려할 것이고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모든 국민이 가장 기대하면서도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두가지, 즉 투·개표의 공명과 결과에 대한 승복이다. 만약 투·개표상에 하자가없는데도 이에 불복한다면 그는 국민적 응징을 받아야 한다.
지금의 대통령후보들은 각자가 선거에 패배할 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과거의 잘못된 유산을 승계했거나 내부 분열, 그로 인한 국민적 기대에의 미흠이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명명백백한 명분없이 선거결과에 승복하기를 거부한다면 자신과 국가의 묘혈을 파는 일임을 모든 후보들은 인식해야 한다.
이제 선거는 끝나가고 있다. 우리는 최선의 후보에 깨끗한 한 표를 던졌다. 이제 이 한 표들이 공정히 개표되고 깨끗이 계표돼야 한다. 모든 후보와 지지가, 국민은 그 깨끗한 개표결과에 승복하고 차선에 만족해야 한다. 국민의 「두번째 승리」 는 거기에 있다.
선거는 권력쟁취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정치행위다. 거기서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지금은 우리 모두가 현재보다는 미래, 현실보다는 이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긴 안목으로 국가경영에 참여해야 한다.
선거의 질서와 정치의 평화, 국가의 발전을 위해 4천만이 하나가 돼야할 때다. 경쟁하던 세력이 화해하고, 대립했던 지역들은 화합하고, 흩어졌던 국민들이 다시 뭉쳐 이 민족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국민적 총력을 모아 나가야 한다. 오늘의 이 청명한 하늘 아래 우리 모두가 이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짐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