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구답게 예술신념도 중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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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박상옥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예술가가 53세면 원숙의 경지에 이르는 때인데 많은 할일을 버려두고 가셨다. 지금 살아계시면 73세, 화단의 한분 원로로서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고 자라는 후생들에게 좋은 지표가 되셨을 것이다. 나는 그림을 시작하던 어린때에 박상옥선생님을 만나 각별한 사랑과 지도를 받고 미술의 길에 들어섰다. 중학교1학년때부터 고3까지 6년, 강성하여 화가의 길에 들어선때까지 모두 l7년간을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속에서 살았다.
지금 호암 갤러리에서 선생님의 20주기 추념 유작전을 보는 감회는 실로 크다. 선생님은 생전에 1백km을 넘나드는 당당한 체격을 가지셨다.
그 체격만큼 건강하셨고 생각하시는 것도 그만큼 여유있고 너그러우셨으며 예술에 대한 신념도 중후하고 확고부동했다. 선생님이 일관해서 그려오신 그림의 주제를 보면 선생님이 지표로 삼았고 정신세계가 대단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선생님의 그림속에는 따사로운 양지녘의 햇살이 있다. 고향집의 토담, 한적한 안마당에 비치는 햇살의 따사로움과도 같다. 옹기종기 모여선 아이들 어쩌면 선생님의 어린시절, 그보다는 우리들의 옛모습을 닮아있다.
선생님이 그리는 아이들·소·토끼, 또 모든 사물은 그 생김새가 모나지 않다. 착하고 어리숙해 보이고 어느 한구석 영악해 보이지 않는다.
모호한듯 애매한듯 하나 부드럽고 너그럽게 표출된 한국인의 성품을 닮았다고 생각된다. 선생님은 우리의 심성, 이땅의 풍광과 자연을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그리신 서울주변의 산과 한 강가의 한적한 풍경, 경주의 옛터와 불상, 생활의 터전인 시장거리와 옛집의 안마당들은 선생님이 이땅에 태어나셔서 살면서 정을주고 보낸 많은 시간속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선생님은 그림을 화면으로 완성하고 자신의 그림양식을 확립하는데도 독자적인 표현을 이룩하셨다고 믿는다. 맑고 투명하게 겹쳐진 색과 형태의 결합은 재래적 명암법의 영역을 넘어선 회화의 현대적 특성, 화면의 평면적 전개를 시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예술세계가 생의 유한성을 넘어선 무한한 예술의 생명력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 전시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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