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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강경화와 82년생 김지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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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윌 듀랜트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겸 역사학자다. 그에 따르면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 된 농업혁명의 숨은 주역은 여자였다. 열매나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남자들이 사냥하러 나간 사이 동굴이나 움막 주위에 끈기를 갖고 씨앗을 심었다. 실험이 성공을 거두면서 인간은 불확실한 수렵 생활을 마감하고 한데 모여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는 농경 생활 단계로 진입했다.

한국 최초 여성 외교장관 탄생 #또 하나의 유리천장 깨는 #기념비적 사건 되겠지만 #남성 중심 문화·관습·제도 바꿔 #진정한 양성평등 실현 못하면 #대부분 여성에겐 그림의 떡일 뿐

여자들은 양·개·나귀·돼지 등을 길들여 가축으로 만든 다음 남자들도 길들였다. 가족애·친절·절제·협동 등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미덕들을 가르쳐 문명의 등불에 불을 밝혔다. 미개하고 야만적인 남자에게 여자의 마법 같은 손길이 닿으면서 비로소 문명이 탄생했다. 듀랜트는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임을 강조한다. 근육질을 뽐내며 잘난 체하지만 사실은 여자들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는 변변치 않은 존재란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100년이라면 정착 생활의 역사는 2~3년에 지나지 않는다. 기나긴 나머지 세월 동안 남자들은 산과 들판을 떠돌며 짐승처럼 지냈다.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사냥과 짝짓기에 목숨을 걸었다. 수렵 생활을 통해 남자들의 DNA에 깊숙이 뿌리내린 ‘마초’ 본능에서 자유로워지기에는 정착 생활 기간이 너무 짧았던 것일까. 잠깐이라도 정신줄을 놓는 순간 남자는 수렵시대로 되돌아가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남자를 길들인 여자의 손길이 없었다면 인류는 이미 멸종했을지 모른다.

모든 게 제멋대로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기도취적 마초 본능의 표상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에 예측불가인 트럼프가 ‘임자’를 만났다.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이다. 39세의 패기와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마크롱은 처음 만난 트럼프와 악수를 하면서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는 ‘선공(先攻)’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며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선언하자 마크롱은 “지구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받아치며 기후변화협약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곁에는 전혀 다른 두 여성이 있다. 23세 연하의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를 곁에 둔 트럼프에게 여자는 남자의 권력과 부(富)를 상징하는 장식품이자 전리품일 뿐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비하하는 그의 저속한 언동을 보면 알 수 있다. 25세 연상의 부인을 둔 마크롱에게 여자는 미숙한 남자를 길들이고 보살피는 엄마 같은 존재다. 트럼프와 마크롱이 보여주고 있는 야만과 문명의 극명한 대비는 여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야만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편하고 배부르면 그만이다. 후세의 미래는 안중에 없다. 문명은 내일을 생각한다. 당장 불편하고 힘들어도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내한다. 기후변화가 바로 그런 문제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해 화제가 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아직도 남자들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비(非)문명성에 대한 통렬한 고발장이다. 입으로는 양성평등을 말하지만 여전히 마초적인 문화와 관습,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작가 조남주는 비수를 날린다. 여성들의 역할과 기여가 정당한 대접과 보상을 받지 못하고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데 대한 실망과 좌절이 원한과 분노를 넘어 정신병적 증세마저 낳고 있다. 어렵게 취업을 해도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면 경력이 단절되고, ‘맘충’으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어느 여성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할 것이냐고 조남주는 묻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 청문회 통과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도덕성과 전문성 논란을 딛고 그는 과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부 장관이 될 수 있을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탄생은 한국 사회에 드리워진 또 하나의 유리천장을 깨는 기념비적 사건이 될 게 틀림없지만 한국의 82년생 김지영들은 물을 것이다. 성희롱적 언행을 일삼고, 틈만 나면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여기고, 돼지 발정제를 자랑 삼아 떠들고, 집안일은 으레 여성 몫이라고 생각하는 마초들이 아직도 널려 있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외교부 장관의 탄생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여성의 손길이 닿을 때 문명은 빛을 발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남자들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기여를 솔직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가정·학교·직장에서부터 양성평등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후진성을 벗고 선진 문명권에 다가서게 될 것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