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최저시급 1만원 공약 … 재계 “15년간 이미 급격히 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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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온 정부, 금성에서 온 재계.”

45페이지 의견서 어떤 내용 담겼나 #정부 ‘비정규직=나쁜 일자리’ 시각에 #재계는 ‘고용 유연성’ 주장 온도차 #청년 의무채용 고용할당제 정책엔 #“시장경제 원칙과 질서 위배” 반발 #경제상황 인식과 해법 모두 엇갈려 #“이해 관계자들 참여 논의의 장 필요”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이에 대해 경제 단체가 정리한 의견을 대조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그만큼 인식의 차이가 깊고 넓다. 사용하는 용어에서부터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 문제점과 해법까지 극단적일 정도로 다르다. 이는 그동안 대결 구도로 일관해 온 노동계와 재계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이들이 간극을 줄이고 협의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협력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상당한 부작용도 우려된다.

◆경영계 의견서 주요 내용=45쪽 분량의 의견서는 새 정부 정책에서 뽑아낸 ▶일자리(12개 항목) ▶노사관계 분야(8개) ▶경제(6개) ▶복지(4개) 등 30개 항목에 대한 분석과 반론, 대안제시로 구성돼 있다. 그동안 국회에 보낸 의견서나 건의서와 비슷한 맥락을 견지하고 있다. 그때 나 지금이나 가장 집중한 것은 고용형태나 임금과 같은 기업 경영에 직접 영향을 주는 사안이다.

새 정부는 최저임금을 2020년까지 시급 1만원으로 인상할 계획이다. 최저임금 결정 기준에 가구 생계비도 포함하려고 한다. 재계는 펄쩍 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견해는 ‘한국의 최저임금이 낮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15년간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올라 영세·중소기업이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최저임금에 가구생계비를 포함하면 ‘임금은 근로의 대가’라는 노동시간의 기본 원칙을 훼손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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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다르다=사소한 용어 사용에서도 견해차는 나타난다. 대표적인 게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나쁜 일자리’로 보는 정부와 ‘비정규직=고용 유연성’이라고 주장하는 재계가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문재인 정부가 낸 ‘대선 핵심 어젠다’는 비정규직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노동시장 문제의 핵심은 ‘친기업적 노동정책 기조가 관철되면서 비정규직이 급증했고, 이는 사회 양극화로 이어졌다’로 요약할 수 있다. 파견·하도급·협력사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다른 명칭으로 본다.

반면 재계는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기업이 근로자를 분류하는 기본 시각은 ‘기간제’와 ‘비기간제’다. 당연히 양측의 온도 차가 크다. 앞으로 5년간 노동문제의 화두가 될 비정규직 문제는 ‘누가 비정규직인가’부터 정해야 한 걸음이라도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판이한 상황 해석=정부는 현재 일자리 부족의 책임 중 상당 부분을 기업이 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업이 수익을 내면 고용이 늘어나는 게 정상인데, 한국 기업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임금 부담이 적은 하도급 업체나 협력사로 일자리를 분산했다는 생각이다. 경영계 의견서는 반대로 정부의 지나친 참견을 문제로 본다. 지나치게 규제를 가하는 시스템 속에서 마음껏 기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일자리를 대폭 늘리려면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육성이 제격인데도 중첩된 규제가 새로운 일자리 창출 기회를 차단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해법은 극과 극=언어와 원인 분석이 다르니 처방도 다르다. 정부는 더 이상 민간에 맡겨둘 사안이 아니라고 다짐한다. 이에 대한 해법은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와 고용을 강제할 각종 관련법 정비다.

경영계 의견서는 이를 잘못된 방향으로 여긴다. 특히 ‘청년고용 할당제’를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대선 공약은 매년 300·500·1000인 이상 규모의 기업에 대해 각각 3·4·5%의 청년 신규채용 의무를 지게 하는 것이다. 재계는 이를 ‘사실상 고용을 강제하는 조치로 시장 경제 원칙과 질서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는 입장이다. 기업 경쟁력 저하 없이 의무 고용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장이 전제돼야 한다. 이는 예측이 어렵다. 재계는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 완화와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를 일자리 해법으로 보고 있다.

◆절반씩만 보는 각각의 진실=양측 주장에는 각각 사실과 오류가 뒤섞여 있다. 재계는 청년고용할당제가 2000년 벨기에에서 시도했지만 실패한 정책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시도할 당시에는 비록 질 나쁜 일자리였지만 일시적으로 취업률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정부가 노동 시장에서 생기는 문제를 모두 기업 탓으로 돌리는 것도 억지스럽다.

전문가들은 누군가가 강제해 기업이 액션을 취하는 것은 부작용으로 이어진다고 진단한다. 당장 SK브로드밴드의 경우 정부 정책과 맞물려 설치기사를 관리할 자회사를 설립하기로 했지만 이 과정에서 기존 협력사 운영자는 졸지에 폐업 위기에 몰리는 등 피해를 봤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며 “노동계와 재계의 입장이 다르더라도 우리 경제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슈를 모아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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