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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실패에 내미는 화해의 손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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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호 32면

아주 어릴 적 기타를 손에 잡았고, 여덟 살에 정식으로 레슨을 시작했다. 재능 있는 아이였다. 연습이라는 생각도 없이 늘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 명문학교에 입학했고 여러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프로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막 시작할 무렵, 환상에서 깨어났다. ‘나의 능력은 여기까지일 뿐, 내가 원하는 그 연주까진 가지 못할 것이다. 연습으로 그 곳에 도달하려면 이번 생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기타를 놓았다. 위대한 예술가의 꿈을 버렸다.

『다시 연습이다』 #저자 : 글렌 커츠 #역자 : 이경아 #출판사 : 뮤진트리 #가격 : 1만5000원

글렌 커츠(55). ‘전직 음악가’였고 지금은 문학 연구가·작가로 활동하는 저자가 ‘연습’을 주제로 풀어나가는 인생 이야기다. 간절히 원하는 무엇이 결코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랑이 너무 깊어 큰 상처로 남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것을 삶에서 놓아버린 후 저자는 무작정 출판사에 들어가 음악관련 책 편집자로 일했다. 그러다 대학에서 다시 문학공부를 시작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 10년 간 손에 들지 않았던 기타를 벽장에서 다시 꺼내든다. 쌓인 먼지를 털고, 현을 고르고, 매일 아침 기타 연습을 시작했다.

저자는 무언가를 연습한다는 건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성공이란 결말로 이어진다. 오늘 홀로 묵묵히 연습하는 이 시간을 통해 언젠가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란 믿음. 하지만 그같은 스스로의 믿음이 사라지면 “끝없는 반복은 마치 고문처럼 느껴질” 것이다. 저자는 이 고문을 견디지 못해 기타를 떠났지만 유별난 외면은 유별난 사랑의 징표였을 뿐. 한밤중에 떠오른 기타 선율에 몸을 떨며, 결국 자신이 음악을 떠나 추구한 것은 “흥미를 자아내는 대상이었지 사랑한 대상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책에는 저자의 경험담뿐 아니라 기타라는 악기의 오랜 역사와 위대한 연주자들, 천재였거나 천재가 아니었던 여러 예술가들의 삶이 담겨 있다. 명확한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던지는 책은 아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새겨진 작가의 고통과 진심이 그대로 전해져 마음을 울렁이게 만든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수록 궁금해진다. 최고의 연주를 포기한 ‘나이 든’ 전직 음악가에게 연습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내가 있는 곳’과 ‘있고 싶은 곳’의 거리가 아득히 멀다는 사실이 명백한 데도 왜 연습을 계속 해야 할까.

다시 연습을 시작하면서 그는 더 완벽한 음악을 연주하고픈 욕망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10년간의 공백으로 실력은 퇴화했고, 고통은 심해졌다. 하지만 그것조차 자신의 이야기로 녹여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더 나은 음악가가 되려면 나는 내 음악을 향한 내 사랑에 포함된 상실감마저 껴안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과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를 연습이라는 형태로 자신에게 들려주는 법을 배워가면서 자신에 대한 실망을 극복해야만 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다시 돌아와 그 고통까지 마주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혼돈과 충돌까지 모두 나의 음악이란 사실을 인정하면서, 지금 사랑하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는 즐거움을 맘껏 누려야 한다. 지금 이 한 번의 연습이 조금 더 나은 연주를 만들 것이란 믿음으로. 비단 음악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의 음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진심으로 연습을 한다면 끝내는 그 연습이 당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꺼내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의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은 그대로 인용하고 싶다. 저자는 매일 아침 연습을 끝내고 기타를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손질한 후 밤색 안감을 댄 케이스 안에 넣는다. 뚜껑을 닫고 걸쇠를 채운다. “아직 표현해야 할 것들이 잔뜩 남아 있다. 연습해야 할 것들도 잔뜩 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연습을 마친다. 나는 오늘 오전 연습을 충실하게 했다. 적어도 최선을 다했다. 이제 불을 꺼 음악과 내 기타가 내일까지 편히 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내일 또 다시 아침이 찾아오면 늘 그렇듯이 연습을 시작할 것이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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