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46) '봉정암 거사' 김재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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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내설악의 품은 넓고 아늑하다. 하지만 내설악도 골산(骨山)인 설악의 반쪽이어서 불쑥불쑥 튀어나온 바위 봉우리들의 양기를 숨기지는 못한다. 수렴동에서 솟아올라 봉정암 뒤 산자락에서 마감되는 '용아장성'의 바위 연봉(連峰)은 내설악의 양기를 뚜렷이 보여준다. 용아장성은 요델산악회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요델산악회의 표범'으로 불리던 송준호씨가 1968년 여름 초등에 성공한 데 이어 요델의 산사나이들은 71년 겨울 초등까지 이뤘다. 때문에 요델의 김재중씨는 여름과 겨울 초등을 이룬 선배들의 열정이 서려 있는 용아장성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됐다.

용아장성 등반은 수렴동대피소에서 시작해 봉정암에서 마무리된다. 김씨는 수렴동대피소와 봉정암에 서너달씩 머물며 용아장성의 다양한 암봉에서 등반을 즐겼다. 그는 설악으로 부는 바람이었다. 아니 설악에서 부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교 졸업 후 요델산악회에 들어간 김씨는 설악의 석주길과 용아장성을 좋아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설악으로 달려가 설악의 산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씻었다. 그가 용아장성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1982년 용아장성을 함께 등반하다 추락사한 동료 김문한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결혼과 취직을 거부했던 김재중씨는 봉정암에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봉정암 거사'로 불리기도 했다. 머리만 안 깎았지 무소유를 철저하게 실천한 불자였던 그는 어느날 밤 늘 지켜보던 용아장성의 한 암봉에서 투신하는 여인을 목격했다.

그는 재빨리 달려가 여인을 구조해 들춰업고 수렴동대피소를 향해 밤길을 뛰었다. 도중에 그는 가야동 골짜기에서 수렴동대피소를 관리하는 이경수씨가 파놓은 토굴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봉정암 거사의 구조활동은 이경수씨의 다음과 같은 회고와 겹친다.

"요 뒤쪽 가야동에 가면 제가 파둔 토굴이 하나 있습죠. 오전 1시만 되면 어김없이 동쪽을 향해 좌정한 산신령이 나타나는 그 토굴에 어느날 선녀 같은 아가씨가 들어오더군요. 그 선녀가 지금의 제 작은 처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이씨는 봉정암 거사를 봉정암 하늘 높은 곳에서 선녀를 보내준 산신령으로 떠받들게 됐다.

설악을 사랑하던 봉정암 거사는 89년 9월 어느날 설악의 울산암을 오르다 영원한 바람으로 돌아갔다. 김재중씨는 산친구인 외설악적십자구조대의 전서화.오세천씨와 함께 울산암 구공길을 등반하다 추락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김씨는 일행의 맨 뒤에서 오르고 있었는데 추락 도중 그의 자일이 끊어진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살이었을까?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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