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폐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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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딸아
네가 아직 아기였을 때
엄마는
공장에서 이제 막 출고된
눈부신 새 차였지

딸아
네 몸무게 영혼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을 때
엄마는
가파른 고갯길을 숨차 오르는
낡은 고물차였지

용서하라 딸아
이제는 폐차
밧데리는 꺼지고
바퀴는 헛돌고
브레이크조차 말을 듣지 않는
녹슨 폐차 엄마를.

허영자(1938~ ) '폐차' 전문



'폐차'라는 말이 진귀한 골동품인 '앤티크'로 들리는 것은 웬일일까. 담백한 언어, 본질을 꿰뚫는 절제의 당당함이 뭉클하다. 복잡한 세상에 시마저 복잡하고 어려운 부질없음이여. 그렇다고 해도 '용서하라 딸아'라는 구절이 너무 쓸쓸하다. 누가 영원히 새 차일 수 있으랴.

문정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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