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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치쑨, 칭화대엔 휴가계 내고 무기 개발 몰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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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26>

1 중앙연구원 성립 20주년 기념식을 마친 중앙연구원 원사(院士)들. 셋째줄 오른쪽 둘째가 예치쑨. 1947년 4월 난징. 이들 모두가 중국과 대만의 교과서에 실린 인물들이다. 앞줄 정 중앙이 주자화.

1 중앙연구원 성립 20주년 기념식을 마친 중앙연구원 원사(院士)들. 셋째줄 오른쪽 둘째가 예치쑨. 1947년 4월 난징. 이들 모두가 중국과 대만의 교과서에 실린 인물들이다. 앞줄 정 중앙이 주자화.

인간에게 질병과 기아, 전쟁을 능가할 공포는 없다. 의료시설의 발달로 역술가와 구분하기 힘들었던, 용한 명의(名醫)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굶주림도 일부 지역 외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전쟁의 공포는 여전하다. 준비할 시기를 놓친 나라들은 주변국 눈치 보며,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곡절 끝 중앙연구원 총간사 부임 #“모든 역량 항일전쟁에 쏟아라” #과학자들에게 탄약 연구 독려

전쟁은 예고편이 있기 마련이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했을 때 중국 국민정부는 잠시 내준 셈쳤다. 상하이와 허베이(河北) 지역을 집적거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부의 적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목적을 이루려면 내부 안정이 필수”라며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정책을 고수했다.

내부 안정은 장정(長征)으로 진이 빠진 공산당 소탕이었다. 누가 봐도 시비 걸 수 없는 정책이지만 국민당은 선전에 약했다. “왜적에게 국토를 헌납하고, 동족에게 총 뿌리 겨누는 매국정권”이라는 공산당의 매도에 총으로 응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공합작’이라는 독배를 마셔버렸다. 어거지로 성사시킨 합작이다 보니 세상은 더 복잡해졌다.

중국의 1세대 과학자 중에는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 많았다.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은 과학구국 외에는 관심이 없던 과학자들을 대표했다. 중앙연구원 원장 주자화(朱家驊·주가화)가 제의한 연구원 총간사 직을 선뜻 수락하지 못한 이유도 단순했다.

일본군이 중국을 저울질할 때 칭화대학은 농업·항공·무선전신 전문연구소를 설립했다. 일본과 전면전이 임박하자 대학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이전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기 위해 학내에 국정조사와 전쟁 지원을 위한 금속관련 연구소를 따로 차렸다. 없는 돈에 5개 연구소 꾸려나가기가 힘들었다. 통합시켜 특종연구사업위원회(特種硏究事業委員會)를 발족시켰다. 예치쑨은 특종연구소 주임이었다. 주자화의 청을 일단 거절하면서 교장 메이이치(梅貽琦·매이기)와 의논하라는 내용을 첨부했다.

메이이치도 교수치교(敎授治校)의 신봉자였다. 주자화에게 간략한 편지를 보냈다. “대학 사정상, 예치쑨이 충칭(重慶)에 머무르며 중앙연구원 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칭화대학을 떠나지 않고 연구원 총간사직을 겸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다.”

2 주자화(왼쪽)는 한국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연도·장소 미상. [사진 김명호 제공]

2 주자화(왼쪽)는 한국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연도·장소 미상. [사진 김명호 제공]

주자화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연구원 규정에 전임직은 겸임이 불가능했다. 행정원장을 역임한 중국 지질학의 태두 웡원하오(翁文灝·옹문호), 훗날 대만대학(臺灣大學) 총장을 지내며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푸쓰녠(傅斯年·부사년)등과 머리를 맞댔다. 규정을 바꾸지 않는 한 묘책이 없었다. 웡원하오가 메이이치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앙연구원 총간사는 전국의 연구기관을 총괄하는 중책이다. 전 총간사도 베이징대학 교수직을 사임했다. 예치쑨을 교수직에서 해임시켜라. 명예교수 위촉은 무방하다.”

메이이치는 패권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며 발끈했다.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출장 차 충칭에 갔을때 주자화와 웡원하오를 방문할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만날 때마다 예치쑨 문제로 시간을 허비했다. 일기도 남겼다. “저녁 무렵 웡원하오를 만났다. 예치쑨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난감했다.” “당 중앙조직부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부장과 마주쳤다. 예치쑨 외에는 중앙연구원 총간사를 감당할 사람이 없다며 하소연했다. 중앙당 조직부장의 정중한 청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푸쓰녠은 입원중 이었다. 편도선을 반이상 절개하는 바람에 말을 못했다. 종이에 예치쑨의 이름을 써서 메이이치에게 들이밀었다. 메이이치는 알겠다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메이이치는 세 사람의 간절한 요구를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동의나 다름없는 메모를 보냈다. “예치쑨이 장기 휴가를 요청하면 허락하겠다. 휴가기간에 무슨 일을 하건 관여하지 않겠다.” 주자화와 웡원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푸쓰녠은 양손으로 목을 감싼 채 한동안 끼득거렸다.

메이이치는 예치쑨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선생이 중앙연구원으로 가는 것은 칭화대학의 큰 손실이다.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다. 중요한 학술기관의 발전을 보며 슬픔을 달래겠다. 정식으로 휴가원을 제출해주기 바란다.”

중앙연구원은 충칭시 한복판에 있었다. 부설 연구소들은 교외에 흩어져있었다. 총간사에 부임한 예치쑨은 원장 주자화에게 유일한 요구를 했다. “원장은 국민당 조직부장을 겸하고 있다. 나는 경비가 삼엄한 조직부에 보고하러 가기가 싫다. 정기적으로 연구원에 와서 보고 받고 지시해 주기 바란다.” 주자화는 군 말없이 수락했다.

예치쑨은 젊은 연구원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1년이 지나자 두각을 나타내는 연구원들이 속출했다. 과학자들에게는 직접 요구했다. “과학자는 단순해야 한다. 머리가 복잡한 사람은 과학자 자격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다. 모든 역량을 항일전쟁에 쏟아 부어라. 적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와 탄약 개발 외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예치쑨은 충칭 교외에 있는 미사일 연구소를 자주 찾아갔다. 한번 가면 며칠씩 머물곤 했다. 연구인원 대부분이 제자들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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