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노예로 팔려간 기생의 삶 추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화냥년(적군에 몸을 더럽힌 계집)’에서 ‘세뇨리따(아가씨)’로 호칭은 바뀌었지만 패전한 나라의 여자가 견뎌야 했던 신산한 일생은 여일하다. 병자호란을 무대로 한 역사소설 『화냥년』(2013년·푸른역사)을 발표해 조선 여인의 치욕과 아픔을 파헤쳤던 유하령(55) 작가가 4년 만에 임진왜란 때 노예로 팔려간 기생이 주인공인 장편소설 『세뇨리따 꼬레아』(나남)로 돌아왔다.

28일 서울 인사동 관훈클럽에서 만난 유하령 작가는 “관습에 저항하는 이들이 내게는 선생”이라 했다.

28일 서울 인사동 관훈클럽에서 만난 유하령 작가는“관습에 저항하는 이들이 내게는 선생”이라 했다.

이 잡듯이 사료를 뒤져 찾아낸 단 한 건의 조선 포로 여인에 대한 학계 보고를 붙잡고 그는 일본 히젠나고야 성부터 마카오, 인도 고아를 거쳐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먼 이국땅을 떠돌았다.

유하령 신작 소설 『세뇨리따 꼬레아』 #“2년간 일본부터 포르투갈까지 누벼”

“기록과 문자는 포로와 노예의 것이 아니라 왕과 사대부의 것이었죠. 적과 대치하면서 생사를 넘나들었던 노예가 된 포로와 쓰러져 간 의병은 붓 없이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갔어요. 붓이 진리를 말하려면 이들의 위치로 닻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인칭 화자(話者)인 기생 정현은 1592년 임진년 4월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에 사로잡혀 파란만장한 노예의 길을 걸어가지만 양반에 복무해야 한다 믿는 ‘기생 엄니’ 수향과 달리 사랑을 놓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유교질서가 더 강화된 조선 땅을 박차고 사랑을 찾아 ‘대항해 시대’의 세계로 떠나는 강인한 여성 정현은 정절의 관념과 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으로 그려진다.

“가부장적 이념으로 숨 막힌 조선에서 이를 잘못됐다 생각한 여자가 있었을까, 상상했어요. 포로의 신분이지만 새 세상을 보고 새로운 사고를 갖고 돌아와 자기 존재에 대한 선명한 의식으로 독립된 사랑을 일구는 인물을 그렸죠. 그런 정현을 보고 포르투갈 선장은 ‘세뇨리따’라 부르며 존중해주고 기예를 펼칠 수 있는 예술가의 길을 권합니다.”

유하령 작가는 집필기간 2년 동안 길라잡이 구실을 해준 남편 한명기(55) 명지대 사학과 교수의 촉(觸)에 크게 힘입었다고 고마워했다. 『화냥년』과 한 해에 쌍둥이처럼 출간된 한 교수의 역사 평설(評說) 『병자호란 1, 2』로부터 역사의 수레바퀴에 낀 두 여인이 잉태됐다. 유 작가는 “해방 공간에서 타오르는 여성 혁명가의 사랑이 다음 얘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