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숫자는 알고 있다, 당신의 많은 것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숫자는 번역이 필요없죠. '1984'(조지 오웰의 소설 제목),'365'(한 해의 날짜),'433'(존 케이지의 작품 '4분 33초')처럼 숫자로만 소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침마다 주식시장의 숫자를 확인하며 세상 돌아가는 걸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숫자의 지배는 더 커질 것 같아요. 주민번호와 핸드폰 번호만 알면 저에 대한 많은 걸 파악할 수 있듯."

멀티아티스트 유현미 ‘수의 시선’전 #주민번호, 휴대폰 번호, 주가지수 … #숫자의 지배가 커지는 세상 되짚기

유현미 작가의 '248'. 120x180cm,inkjet print, 2014사진=사비나미술관

유현미 작가의 '248'. 120x180cm,inkjet print, 2014사진=사비나미술관

'數(수)의 시선'이란 제목으로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멀티아티스트 유현미(53) 작가의 얘기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사진, 설치, 영상 등 18점의 작품에는 모두 1·2·3·4 같은 아라비아 숫자가 제각각 등장한다. 그 의미를 곱씹기에 앞서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숫자를 공통의 조형요소로 활용한 각 작품의 독특한 효과다.

전시장 2층에 자리한 마치 그림처럼 보이는 사진 작품이 한 예다. 언뜻 숫자와 여러 사물을 함께 그림으로 그리고 색칠을 한 정물화 같지만, 실은 미리 제작한 숫자 모형을 포함한 사물과 그림자와 그 배경인 공간까지 마치 회화처럼 각각 색칠한 뒤 이를 사진으로 찍어 프린트한 것이다. 1층에 자리한 '수학자의 시선'은 더 흥미로운 시도다. 흰색 공간에 숫자를 포함해 흑백의 사물을 배치한 설치작품인데, 관람객이 그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 결과물은 입체의 공간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마치 평면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최측의 표현을 빌면 '관객 참여 드로잉 프로젝트', 일종의 그림이란 얘기다.

유현미 작가의 작품 '수학자의 시선'이 설치된 공간. 사진=이후남 기자

유현미 작가의 작품 '수학자의 시선'이 설치된 공간. 사진=이후남 기자

설치작품 '수학자의 시선'의 공간 안에 유현미 작가가 자리했다. 사진=사비나미술관

설치작품 '수학자의 시선'의 공간 안에 유현미 작가가 자리했다. 사진=사비나미술관

이처럼 평면과 입체를 뒤섞는 작가의 시도가 주는 유희적 재미는 지하층에 설치한 비디오 작품도 마찬가지다. 학교 강의실, 욕실 같은 실제 공간을 화폭 삼아 흑백의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는 과정을 찍은 듯 보이는 동영상이다. 실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처럼, 공간에 검은 선을 더할 때마다 일일이 사진을 찍어 동영상으로 연결한 것이다. 평면과 입체에 더해 공간과 시간까지 뒤섞는 이른바 '영상 드로잉'이다.

작가가 숫자에 초점 맞춘 작업을 시작한 것은 8년쯤 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네 번째 별 사람이 별들의 숫자를 세는 얘기가 자극이 됐다고 한다. 이를 두고 작가는 "수에 집착하는 어른의 이야기, 여기서 숫자는 가장 세속되고 물질적인 것의 상징"이라고 했다. 반면 이와 다른 수의 세계도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수학자의 시선'에 영감을 준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그렇다. 작가는 "수학박사의 머릿 속 수의 세계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수로 이뤄진 건축물이 상상되어진다"며 "이같은 수의 세계는 가장 정신적이고 불가해하고 '뫼비우스의 띠'같이 영속적인 동시에 유한하다"고 했다.

이런 얘기가 혹 어렵게 들린다면 작가의 다른 얘기도 있다. "'1'은 일등인 동시에 나머지 모두를 패자로 만드는 숫자 같아요. '2'는 여왕 같은 느낌이구요." 숫자를 셈하기에 앞서 그 생김새, 숫자가 지닌 조형성에서 이런 저런 상상을 했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4월 7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