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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제대로 된 경고 시그널 어떻게 보낼지 고민 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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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12면

스티븐 웡 말레이시아 국제전략연 부소장

스티븐 웡 말레이시아 국제전략연구소 부소장은 “말레이시아가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단교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이 사건은 국제 정세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전수진 기자

스티븐 웡 말레이시아 국제전략연구소 부소장은 “말레이시아가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단교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이 사건은 국제 정세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전수진 기자

김정남 피살 사건이 2라운드에 접어들었다. 말레이시아 경찰에 체포된 유일한 북한 국적 용의자였던 이정철이 3일 추방 형식으로 풀려나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정철을 풀어준 상황에서 말레이시아 당국이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피살 물질 VX로 밝혀지며 기류 변화 #북한 언제든 화학무기 사용 가능 #단교까진 아니나 모종의 조치 취할 것 #6자 회담보다 큰 외교의 틀 필요

이번 사건에서 말레이시아 정부의 대표 격으로 나서고 있는 아흐마드 자히드 하미디 부총리는 외교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는 지난 2일 말레이시아 정부가 2009년부터 북한과 맺은 비자면제협정을 6일부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말레이시아가 쥔 카드 중 가장 초강수라 할 수 있는 건 북한과의 44년 외교관계를 끊는 조치다. 자히드 부총리는 북한과의 단교 가능성을 묻자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중요한 것은 (북한이) 첫째로는 외교적 절차를, 둘째로는 말레이시아의 법을, 셋째로는 말레이시아의 문화와 윤리규정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라고만 답했다. 단교 카드를 앞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실제로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단교를 강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견해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국제전략연구소(ISIS) 스티븐 웡 부소장은 이렇게 단언했다. “말레이시아가 김정남 피살 사건으로 북한과 단교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옳다.”

쿠알라룸푸르 잘란 텔라위에 있는 ISIS 부원장실에서 중앙SUNDAY와 만난 그는 “단교를 논하는 건 말레이시아의 국가 전략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곧 모종의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웡 부원장은 말레이시아 왕실이 수여하는 ‘다토(Dato)’ 작위까지 받았을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전문가다. 정부 인사들과도 교류가 깊다. 그의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웡 부소장은 “지금 보이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김정남 피살이라는 말레이시아발 폭풍이 국제 질서를 흔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점에서 “쿠알라룸푸르는 지금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비슷한 처지”라며 “세계 정세의 소용돌이 무대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미얀마가 아웅산 테러 이후 그랬듯 말레이시아도 북한과 단교를 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자히드 부총리 역시 부인하지 않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외교 전략은 ‘모든 나라를 비슷하게 대할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슬람·불교·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화합하며 살아가기 위해선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게 우리가 체득해 온 원칙이다. 단순한 원칙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선택한 전략이다. 설령 한 국가(북한)가 불량하다고 해도 말레이시아에 직접적인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굳이 나쁘게 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말레이시아 국민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속내는 뭔가.

“고위 정부 인사들도 사건 발생 후 초기엔 (북한에) 강경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북한 측의) 반응과, 암살에 사용된 독극물이 주변 인물도 쉽게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VX가스라는 점 등으로 기류가 확 바뀌었다. 단교까지는 가지 않으면서도 북한에 제대로 된 경고 시그널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가 고민의 핵심일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로서는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국내외 모두에서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가능한 시나리오는.

“아직 말하기엔 이르다. 암살 용의자들이 곧 기소될 것이고, 그 과정을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정부가 이번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이 상당히 신속하다고 평가한다. 이후 특정 국가들과의 협력도 선택지에 있을 수 있다.”
중국과의 협력 말인가.

“글쎄. (김정남 관련) 데이터를 갖고 있는 국가들은 여러 곳이라고만 말해두겠다.”
김정남이 거주하는 마카오는 중국의 영향력이 크다. 암살자들이 다른 곳이 아닌 말레이시아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즉답을 피하며) 쿠알라룸푸르는 지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부다페스트처럼 국제 정세가 급변을 맞이하는 주무대가 됐다. 신중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VX가스가 김정남 피살 물질이라는 건 북한이 언제든 화학무기를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생화학무기는 핵탄두처럼 소형화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일 필요도 없다. 이제 북한은 너무도 쉽게 인명을 대규모로 세계 어디에서든 살상할 수 있게 됐다.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보다 더 크고 새로운 외교의 틀이 필요하다.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국제 정세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다.”
김정은 정권에 대한 평가는.

“말레이시아 정부도 김정은 정권에 불만이 클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국제사회는 선택을 잘 해야만 한다. 방법은 몇 가지 있다. 대북제재를 강화하거나, 북한을 협상으로 이끌어내거나. 문제는 이 둘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다. 대북제재를 강화해봤자 북한의 저항만 더 거세질 뿐이다. 김정은은 지금 과거 미얀마 독재정권이 그랬던 것과 같이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가 제재를 세게 가할수록 더 고립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화를 추구하자니 북한이 원하는 바에 끌려갈 가능성이 있다. 이래저래 김정은은 국제사회의 더 큰 골칫거리가 됐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말레이시아 정부는 물론 국제사회 모두가 새로운 문법의 언어로 얘기해야 할 때가 왔다.”

쿠알라룸푸르=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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