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빚던 손들은 어디로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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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추석이 되면 공연히 마음이 두둥실 들떠온다. 이번 추석은 연휴가 계속되어 더욱 신난다고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모이면 제각기 설계를 하느라 야단들이었다.
그 설계라는 것이 집에서 무얼 한다든가 같이 들노는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니라 무슨 차를 타고 누가누가 어디를 갈 것인가 하는, 여행스케줄이 대부분이다. 일과시간에 매여 사는 현대인들에게 며칠 간의 빈 시간이란 얼마나 소중한 자유이며 구원인가.
조상의 제사는 만들어 놓은 떡과 지짐과 반찬들과 과일 사다 차려놓고 절 한번 하면 끝나고, 성묘는 여행 삼아 떠나서 둘러 가면 그만이다.
이렇게 간편해진 세상에 마음만 좀 있고 머리만 쓴다면 효도 못할 사람은 어디 있고 외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나만해도 벌써 현대인이 아닌 옛사람인가 보다.
추석하면 먼저 어릴 적 잠을 설치며 기다리던 추석빔, 송편 빚기, 친구아이들과 뒷동산으로 달맞이 가던 추억들이 그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때 추석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온 식구가 무엇이든지 힘을 합해야만 했다.
우선 가장 되시는 아버님은 돈을 만들어와야 했고, 어머니의 할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아이들인 우리 형제들도 뭔가 할 일이 많았다.
서울에 이사온 후에도 가회동 산밑에 살던 우리는 추석이 되기 며칠 전부터 뒷동산에 올라가 시루밑에 깔 소나무 잎을 따다가 씻어 말리곤 했다.
한달 전부터 우리6남매의 추석빔을 손수 지어놓으시고 난 어머니는 이제 차례 상 차릴 준비에 마음과 몸이 지칠 대로 지친다. 햇곡을 준비해 떡쌀을 담그고 술을 빚고 나그네들을 위해 햇밤과 햇대추로 꿀을 섞어 율란과 조란을 만들기도 했다. 막상 보름달이 떠오르기 하루 이틀 전에는 온가족들과 친척들이 대청마루에 모여 앉아 송편 빚기를 시작한다.
큰집·작은집, 형제들과 그 아이들까지 모여서 떡을 빚는다고 밤새껏 떠들다보면 그야말로 잔치분위기는 무르익게 된다.
할머니나 어머니나 고모들은 아까운 떡쌀 버린다고 우리들의 송편 빚기를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더 하고싶어 구박을 받아가며 떡쌀을 떼다가 속을 통통히 넣어 송편을 동글동글 만들었다.
그런데 보기에는 그렇게도 쉬워 보이는 송편 빚기가 막상 해보니 왜 그리도 어려운지….
어른들은 손가락 두어 번 누르면 동그라니 예쁘게도 빚어지는 송편이 내 손에서는 왜 그렇게 이리 찌그러지고 저리 찌그러지는지 창피해서 살싹 살싹 감추어 놓곤 했다.
어른들은 쉴새없이 우스갯 소리들을 해가며 빚는다.
『얘야, 송편을 곱게 빚으면 이담에 시집가서 예쁜 딸을 낳고, 찌그러지게 빚으면 찌그렁퉁이 못난 딸을 낳는단다.』
어른들의 이런 말이 내 손을 더 떨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시집을 갔고, 송편 솜씨와는 상관없이 예쁜 두 딸을 낳았다.
이제 추석이 오고 보름달은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휘영청 밝은데, 떡 빚던 가족들과 아이들, 친구들은 다 어디로들 가버렸는가! 손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음식을 만들어 조상에게 바치고 가족들을 먹이던 여자들의 손, 정성과 사랑 어린 그 마음씨야말로 비록 몸은 고되었으나 여자의 행복이요, 한국인의 마음이요, 전통 있고 예절 있는 사람들의 사는 법도가 아니었던가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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