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술에 도사린「독재 음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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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달 인텔 개발자 포럼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일명 ‘확장성 펌웨어 인터페이스(EFI)’라는 인텔 기획안에 대해 소개 한 바 있다. 그 기획안은 충실한 내용에 비해 사실 별 재미는 없었다. 문서에 따르면 인텔은 PC의 바이오스를 대체하기 위한 소형 운영체제를 대중화 시킬 계획이다. 계획 자체는 별로 문제될 게 없다.

PC의 기본적인 입출력 시스템인 바이오스는 1981년 PC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어져 오고있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어셈블리 언어로 짜맞춰진 수공품. 어셈블리 코드를 보고있으면 마치 알 수 없는 암호문이라도 보는 기분이다. 지금까지도 바이오스가 모든 PC에 사용된다는 것은 정말 소모적인 일이다. 따라서 인텔의 제안은 현명하고 적절하며 제대로 짚었다고 할 수 있다.

바이오스는 현대 컴퓨팅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컴퓨터에 전원이 들어오면 바이오스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메모리 컨트롤러, 하드디스크 인터페이스, 비디오 카드가 제대로 동작하는지 점검한다. 마더보드위에 장착된 모든 장치를 불러모으고 정렬시켜 운영체제 가동을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수 없이 다양한 조합을 모두 다룰 줄 알아야 하고 확실한 신뢰성까지 갖춰야만 한다. 바이오스는 운영체제가 모두 로딩돼 컴퓨터 통제권을 가져가기 전까지 좁은 플래시 메모리 안에서 컴퓨터를 지휘한다. 용량에 여유가 없기때문에 극도로 최적화된 코드가 필요하고 어셈블리 언어가 쓰일 수 밖에 없다. C나 자바로는 어림도 없다.

EFI는 이보다 진화한 형태이다. 바이오스 대신 소형 운영체제를 사용한다. 이 운영체제는 칩에 탑재될 만큼 용량이 작지만 디스크에서 데이터를 읽고 네트워크 통신을 하고 기본적인 파일을 처리하기에는 충분하다. 또 C나 자바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구동시킬 수 있는 간단한 인터프리터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바이오스 형식의 프로그램을 작성할 경우 소프트웨어 코드를 작성해 컴파일시켜 EFI에서 동작하는지 시험해 볼 수 있다. 인텔은 이제 어셈블리 언어로 일일이 장치 드라이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한다. 또 하드웨어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유틸리티가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아주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과거를 되짚어보자.

초창기 PC산업의 역학구도를 결정한 것이 바로 바이오스다. IBM은 자사 PC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그 유명한 ‘IBM PC 테크니컬 레퍼런스 매뉴얼’을 통해 IBM은 바이오스의 기판 회로도를 비롯해 전체 구성요소를 빠짐없이 공개했다. 이는 당시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보라색 표지에 고리 제본된 이 책은 짧게 줄여서 ‘테크레프’로 통했다. 테크레프는 소프트웨어를 제작할 때 필수적인 참고서이자 PC의 모든 세부사항을 볼 수 있는 백과사전이었다. 전 세계 연구개발 센터에서 테크레프는 성서나 다름없었다.

단, 테크레프를 통한 불법복제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테크레프 뒤에는 IBM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 군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로써 IBM 정품 바이오스를 채용한 호환 컴퓨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완전히 똑같은 바이오스가 아니면 IBM 호환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IBM 바이오스와 하드웨어 세부사항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됨에 따라 IBM PC는 ‘데스크톱 컴퓨터의 표준’이라는 위상을 확립했다. 바이오스는 IBM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던 IBM의 독재는 컴팩의 반란으로 막을 내렸다. 컴팩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IBM PC와 완전히 호환되면서 동시에 IBM의 지적재산권을 전혀 침해하지 않는 바이오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컴팩은 테크레프는 커녕 PC에 대해 별 전문 지식도 없는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발굴해 이들에게 바이오스의 기능을 숙지시켰다. 바이오스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교육받은 이들은 이후 외부와 철저히 격리돼 바이오스 프로그래밍 작업에 착수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IBM 바이오스에 대한 내용을 이들에게 말하게 되면 그 '참신함'이 오염될 수도 있기 때문에 대화조차 할 수 없었다. 컴팩은 결국 이 방법으로 IBM 바이오스와 완전히 동일한 기능을 하는 새로운 바이오스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IBM 변호사들은 강도높은 법적 대응에 착수했지만 막상 바이오스를 개발한 프로그래머들은 어떻게 건드려 볼 수가 없었다. 컴팩은 법적 근거하에 이 프로그래머들을 보호했는데 당시 소문에 따르면 IBM은 이같은 컴팩의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컴팩의 바이오스와 프로그래머들에게는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판결이 확정됐고 이후 진정한 ‘호환 시대’가 시작됐다. IBM은 혁신적인 신형 PC인 PS/2 시리즈를 선보이며 PC 시장의 지배권을 탈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만일 훨씬 까다로운 지금의 지적재산권법과 저작권법을 당시 상황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컴팩의 바이오스는 결코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며, PC산업은 지금보다 5년쯤 뒤쳐질 것이다.

인텔은 EFI로 한때 IBM 바이오스가 누렸던 절대권력을 재현할 기회를 잡은 셈이다. 인텔이 이러한 권한을 갖게되면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디지털 저작권법(DRM)을 적용할 수 있다. 즉 당시의 컴팩 바이오스와 같은 '반란'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EFI는 장점도 있지만 이처럼 시장 독점 체제로의 퇴보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더이상의 독점체제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IBM은 BIOS 사업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정작 IBM이 해야했던 것은 “다른 업체들이 BIOS 사업에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자료제공 : ZDNe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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