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정비전 제시 못한 대통령 신년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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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통령의 신년회견은 한 해의 국정운영 방향과 핵심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의회에서 신년연설을 하지만, 한국에서는 신년회견이 그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 신년회견을 봐서는 올해 국정의 초점은 어디에 둘 것인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현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다. 지난 18일의 신년연설에서 제시한 '양극화 해소'과제에 대해서도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북한 위폐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관여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명확한 답변을 피했고, 검경 수사권 분쟁에 대해서도 "아직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 단계가 아니다"고 했다. '사회 취약계층을 상대로 한 협박과 갈취'에 대한 경고와 4대 폭력 근절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이 또한 총리 주재 장관회의와 4대 폭력대책반이 가동 중인 사안이다.

현안은 외면한 채 원론적 답변으로 일관할 바에야 굳이 신년연설과 신년회견으로 나눠서 할 이유도 없었다. 국민이 신년회견에서 기대한 것은 적지 않다. 대통령 보좌에 문제점이 드러난 청와대와 정부의 쇄신책, 국정의 양 축인 청와대와 여당의 엇박자 조정책, 이념적 양극화 문제의 해소방안 등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어야 했다.

노 대통령이 여론을 받아들여 증세(增稅) 주장을 거둬들인 것은 다행이다. 노 대통령은 "당장 증세를 주장하지 않는다"면서 "대통령도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했다. 신년연설에서 복지 지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역설한 것과는 사뭇 다른 어조다.

그렇다면 증세론이 불러온 1주일간의 혼란은 누가 책임져야 하나. 더구나 증세론 대신 감세(減稅) 주장의 타당성을 먼저 따져보자고 나선 것은 논점을 흐릴 위험이 다분하다. 새해 벽두부터 양극화 해소를 위해 증세의 필요성을 강력히 시사한 것은 노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지고 주가가 폭락하자 발을 뺀 것이다. 그래놓고 노 대통령은 "증세 논쟁으로 끌고 가서 정략적 공세에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책임을 엉뚱한 곳에 돌렸다.

대통령은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도 정부는 완벽한 정책을 만들었는데 이를 무력화하려는 집단 때문에 잘 먹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론이 나빠지거나 일이 잘못되면 항상 불순한 세력의 탓이라고 둘러대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처사다.

우리는 증세 여부에 앞서 복지 확대와 '큰 정부'의 타당성을 먼저 따져보고,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복지 지출과 공적 영역의 지나친 확대에 대한 근본적 논의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