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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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0년대 후반에 접어든지금 미술계에 여전히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중의 하나는 형상성의 추구다.
이른바 총체적 삶의 세계를 드러내려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 인식과 참여가 미술이라는 표현형식을 통해 명확한 사조로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에서 이러한「형상」의 개념을 젊은 작가들이 수용하게 되는 근저에는 먼저 미술이「우리」라는 공동체적 인식보다 개별적인 세계에 닫혀 있었고, 너무 오랫동안 미술이라는 자율성아래 지적·사변적 관념론이 만연되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면에는 현실을 비춰주는 하나의 거울로서 미술이 표현언어의 시각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도 간과할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강미술관이 기획한 제1회 한국형상미술제 (9월18일까지·(327)1077) 는 그 미술관과 젊은 세대들이 주력해 온 「자생적 표현언어로서의 미술」을 구축하고 정리하려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두말할것 없이 형상성의 회복뒤에는 그동안 80년대초부터 일기 시작한 통칭 「새로운 미술운동」의 그룹들인 「현실과 발언」「젊은 의식」「시대정신」「임술년」등 대규모 기획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 전시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형상성을 가진 1백60여명이라는 결코 적지않은 신세대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다음 세대의 미술을 걸머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예술을 통해 우리들의 삶과 현실을 어떻게 표출해내고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이 단순한 사실이나 기록 전달의 차원이 아니라면 이들의 일부가 보여주고 있는 1차원적 재현의 형상은 전달형식의 효율적 가치에서나 감성의 대화, 또는 공유라는쪽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시의 대형화다. 늘 대규모라는 외형은 다만 그 예술의욕과 열기를 가늠하는 척도일 뿐이지 그것의 가치나 평가를 내리는데 절대적인 기준은 되지 못한다.
형상은 하나의 양식일뿐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될수 없다. 작가는 형상을 통한 자신의 치열한 정신세계를 어떻게 작품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점에서「웨이들레」가 『형상, 그것은 인간의 제2의 언어』라고 명명한 것은 바로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표현형식에 대한 명쾌한 답변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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