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7. 여가수 이정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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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운데)는 요즘 이종성(베이스·왼쪽)·유상원(드럼·오른쪽)씨와 함께 용인에 작업실 겸 숙소를 짓고 있다. 안성식 기자

나는 '애드 훠'를 결성하면서 국민의 반응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결과는 그에 못 미쳤다. 애드 훠는 지금 세종문화회관인 옛 시민회관, 서울 세종로 '아카데미' 음악 감상실, 명동 '오비스 캐빈'의 꼭대기층 등에서 공연했다. 순회 공연을 하면 티켓은 매진됐지만 우리 손에 떨어지는 게 거의 없었다. 당시엔 쇼단장의 힘이 엄청났다. 문화공보부에서 단장증을 몇 사람에게만 내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먹도 좀 쓰는 '힘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국의 극장을 독점한, 한마디로 '주먹단장'들이었다. 연예인들은 돈을 못 받고 착취당하기 일쑤였다. 겨우 생활이나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공연이 없을 땐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나의 경우 아내가 큰아들인 대철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할 수 없이 밴드를 해산했다. 1966년의 일이었다.

다시 미 8군으로 들어갔다. 미 8군에서 쇼를 하기 위해 구성한 밴드가 '덩키스'다. 여자 가수가 한 명 필요했다. 신인 가수를 찾아다니다 발굴한 게 이정화다. TV 공개방송에 나온 걸 우연히 보고는 무릎을 쳤다. 그러나 미 8군 무대의 경기가 옛날같지 않았고 공연 횟수도 적었다. 월급은 회사에서 꼬박꼬박 나왔지만 마음은 점점 가난해졌다. 그래서 일을 저질렀다. 이정화에게 음반을 내게 한 것이다. 그때 내가 준 곡이 '봄비'와 '꽃잎'이다.

두 곡은 나중에 히트하긴 했지만 처음엔 반응이 별로였다. 미 8군마저 사양길로 접어들자 이정화는 베트남으로 떠나버렸다.

베트남전쟁이 길어지자 국내 쇼단들은 미군이 몰려 있는 그곳으로 찾아들어갔다. 미군 무대 경험이 많은 한국팀들이 아무래도 경쟁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정화를 빼고 5인조로 덩키스를 재정비한 뒤 새로 미 8군 오디션을 봤다. 가끔 비공식 쇼에도 나갔다.

사실 난 애드 훠와 이정화의 음반에 썩 만족하지 않았다. 성격 탓이었다. 나는 녹음이 끝난 판은 두 번 다시 듣지도 않는 특이한 성격이다. 요즘에 와서 옛 판을 다시 들어 보면 '내가 한 건가'싶을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던 곡들도 있다. 나는 늘 창작 의욕이 살아 넘친다. 한번 작업을 하고 나면 바로 잊어버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자꾸 돌아보고 축적하면 늘 비슷비슷한 게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래서 늘 버리고 비웠다. 매번 '더 잘할 수 있는데, 이게 아니라 뭔가 더 있을 텐데…. 에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잘해야지'란 식이었다.

그 성격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으니 들어앉아 누릴 때도 됐건만, 내 팔자엔 '만족'이란 없나보다. 아직도 늘 기계를 만지고 음악을 만든다. 일종의 습관인 듯도 하다. 음악은 물론이고 다른 생활습관도 비슷하다. 난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 젊을 때부터 바쁘게 살다 보니, 그게 몸에 밴 모양이다.

요즘 나는 서울 문정동의 작업실 겸 숙소인 우드스탁을 경기도 용인으로 옮기기 위해 공사를 하고 있다. 큰아들 대철이가 사놓은 땅에 내가 직접 설계한 2층집을 짓고 있다. 뼈대만 건축회사에 맡기고 살을 붙이는 작업은 직접 하고 있다. 하루는 앞집 아주머니가 같이 작업하는 우리 멤버에게 묻더란다.

"신중현 선생은 뭘 저렇게 매일 직접 두드리신대요?"

"저 분은 원래 직접 만드는 걸 좋아해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요…"

신중현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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