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건강한 노사관계」가 외세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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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든 자본가는 노조운동탄압을 위해 군부독재정권에 공권력의 개입을 이구동성으로 요청하고 있다. 군부독재의 분열책동과 탄압을 딛고 일어서서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하자….』
울산 현대중공업등 현대계열사 근로자 2만여명이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인 18일 상오. 울산에 있는 어느 대학교의 학생연합회 소속 박모군(24)등 7명이 농성장에 나타나 이같은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뿌렸다.
그러나 근로자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유인물을 주워든 근로자들은 박군등에게 욕설을 퍼붓고 7명을 회사 운동장까지 끌고갔다. 『너희들이 뭔데 남의 회사일에 참견하느냐』며 일부 흥분한 근로자들은 10여분동안 박군등에게 뭇매를 때린 뒤 풀어줬다.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권투쟁이 다른 목적에 이용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일반적 태도다.
「6·29민주화조치」이후 발생한 부산국제상사, 금성사 평택공장, 구로공단내 경방기계, 삼립식품등 근로자들의 파업농성은 위장취업자가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예다.
「직접 노동관계를 맺고 있는 근로자나 노동조합, 또는 사용자, 기타 법령에 의하여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쟁의행위가 발생했을시 관계당사자를 조종·선동하는 행위를 해서는 아니된다.」(노동쟁의조정법 13조2항)
우리나라 노동쟁의조정법은 제3자가 노동쟁의를 조종·선동하는 것을 명문으로 금지하고 있다. 「3자 개입금지」조항이 신설된 것은 제6공화국 출범 직전인 80년 12월.
70년대후반 일부 종교세력등「외세개입」노동운동이 확산되는 현상에 대응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외부세력」의 개입은 근절되지 않았다. 80년 이후 드러난 새로운 양상은 이른바 위장취업.
경찰등 관계기관에 따르면 85년 4월 대우자동차 노사분규이후 전국 사업장(4백24개업체)에서 적발된 위장취업자는 8백30명. 거의 대부분 대학졸업·중퇴자인 이들은 신분을 속이고「저 낮은 곳」으로 스며들어 근로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조작화하고 단체행동으로 끌어냈다. 이른바「민중혁명」전략으로서의「노학연계투쟁」.
당국의 분석집계에 따르면 85년 한햇동안 발생한 총2백65건의 노사분규중 60건(23%)은 위장취업자가 이끌었다. 86년 또한 총발생 2백76건중 38건(14%)은 위장취업자가 개입했다.
노동부 정동우기획실장-.
『위장취업자들은 주로 근로조건이 취약한 업체에 취업, 임금인상등 근로조건개선을 위한 대형노사분규를 일으키고 공공건물 점거 및 분신자살 기도등 과격행위로 사회물의를 야기시키며 기존노조를 이용으로 매도하고 위장취업자 중심의 신규노조결성을 주도한다. 그리고는 동료 근로자들 의식화시켜 과격단체를 조직하고 노학연계투쟁을 선동, 노동문제를 정치구호화 한다.』
왜 위장취업이란 또다른 형태의 제3자 개입이 생겨났고 가능했는가.
『우리 노동자들은 70년대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정당한 분배를 받지못하고 전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희생만을 강요당해왔다. 노총등 노조 상급단체는 어용화되어「5·16」「유신」「4·13」지지성명을 내야했고 근로자의 권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노동자에게 노동3권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기독교노동자총연맹 유동우위원장은『시대적 상황이 이른바 학생운동권등 제3자의 노동운동 참여를 자초했다』고 말한다.
이들에 대한 평가와 근로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제도권의 노동자단체나 조직이 제대로 못하고 있는 구실을 대행하고 있다는 긍정적 시각과, 결코 이들이「근로자」일수는 없으며 노동운동을 다른 목적에 이용하려 듦으로써 결과적으로 근로자의 권익을 해치고 노동운동을 왜곡시킬지도 모른다는 부정적 시각이 그것이다.
당국은 위장취업자외에 일부 종교단체와 관련을 맺고있는 각종 재야노동운동단체도「외세」로 주목하고 있다.
9월 개학과 함께 이들 위장취업 해고근로자아 재야노동단체들이 노학연계투쟁을 전개, 심각한 사회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클것이란 분석이다.
경인지역등에서는 해고됐던 위장취업자들이 최근 다시 복직요구 움직임까지 보여 사업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서울 구로공단의 경우 7월 하순께부터「서울지역 해고근로자 복직투쟁위」소속 회원 50여명이「원대복직」을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해당 사업장 정문앞에서 연일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봉제업체인 H사는 이들의 시위로 일부 종업원들이 동요하자 3백여 전종업원을 대상으로「복지찬성·반대」를 묻는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90%가 「복직반대」. 회사는 이를 근거로 거부 방침을 확정했다.
서울대 이상면교수(법학)-.
『노사문제는 어디까지나 노사당사자간 문제로 제기되고 해결되는 것이 순리고 원칙이다. 그런점에서 제3자의 개입은 없어야하며 노사쌍방이 외세를 끌어들일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외세 개입은 역사적 연유를 갖고 있다. 외부세력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근로자들의 합법적인 노동운동이나 합리적인 요구사항을 폭넓게 수용할수 있는 사용주의 노사관 확립이 선결되어야한다.』
이교수는『제3자의 개입없이도 근로자 스스로가 노사문제를 해결할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건강한 노사관계를회복시키는 것이 외세를 막는길』이라고 강조했다. <김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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