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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끝내주네, 대학가 대자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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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시’무룩, ‘국’민무룩, ‘선’사시대야 뭐야, ‘언’제적 샤머니즘?”

최순실 국정농단 계기 다시 활기
긴 문장 대신 짧지만 강렬한 풍자
포스트잇·종이띠 등 형식 파괴
SNS·오프라인 공론 함께 활성화
“젊은 세대의 하이브리드형 소통”

“‘시’험을 망쳤어, ‘국’가도 망했어, ‘선’무당은 알았을까, ‘언’노운(unknown) 했겠지.”

지난 16일 연세대 학생회관 1층에는 4행시 형식의 시국선언문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20자 내외의 ‘미니 대자보’는 바삐 걸어가던 학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 대자보를 보고 있던 대학생 황재혁(22)씨는 “집중해서 봐야 하는 기존의 대자보와 달리 지나가다가도 쓱 읽고 웃을 수 있어 더 눈길이 간다”고 말했다.

세로드립 4행시

세로드립 4행시

국정 농단 사건이 대학 내 대자보 문화를 부활시켰다. 특히 정유라(20)씨의 입학·학사 특혜 의혹이 공분의 토대가 됐다. 학생들은 오랜만에 펜을 들고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로 70㎝, 세로 1m 전지에 빼곡히 글을 써 넣었던 기존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규격과 형식에 갇히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로드립(세로로 글자를 읽으면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글의 형식)’과 ‘해시태그(#)’ 등도 자주 활용된다. 본래 대자보가 지닌 무게감을 다소 덜어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온라인상에서의 글쓰기가 익숙한 대학생들이 이 방식을 오프라인에서도 활용한 하이브리드(혼합형) 형태의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A4용지

A4용지

이러한 ‘하이브리드형’ 대자보의 발원지는 이화여대다. 이화여대는 정씨의 특혜 의혹 중심에 선 학교로 지난 7월 말 학생들이 본관 점거 농성을 시작한 이후 올 하반기 내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교내에는 학교의 행태를 고발하는 전통적인 대자보부터 해학적이면서 함축된 문구만을 담은 대자보까지 다양한 형태의 대자보가 등장했다. 20일 이화여대에는 ‘잘 키운 말 하나 열 A+ 안 부럽다’ ‘입학은 네 맘이지만, 졸업은 내 맘이란다’ 등의 문구가 인쇄된 A4 용지들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종이띠 잇기

종이띠 잇기

‘쌍방향’ 소통을 추구하는 대자보도 나왔다. 연세대에서 ‘무너진 연세인 교육권 다시 세우기’ 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학생회관 1층 기둥에 ‘교육에 바라는 소원띠를 함께 만들어 달라’고 적었다. 이 글을 본 학생들은 온라인에 댓글을 다는 것처럼 ‘학생들의 목소리가 닿는 학교’ ‘토론하고 생각하는 대학다운 수업’ 등 각자의 희망사항을 적어 종이띠를 이어 나가고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정치적 구호 대신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마디’로 이목을 끌기도 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제를 다루는 연합 동아리 ‘평화나비’는 작은 나비 모양의 포스트잇을 서강대·고려대 캠퍼스 등에 붙였다. 포스트잇에는 1992년부터 10년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95) 할머니가 마지막 재판에서 한 말인 ‘재판에서는 졌어도 내 마음은 지지 않았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전문가들은 대자보 자체가 지닌 ‘진정성’이라는 이미지와 온라인의 ‘파급력’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김윤태 교수는 “대자보의 부활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대학가 공론장을 대체하는 추세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실험으로 온라인에선 묻히기 쉬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행위다”고 분석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거친 구호보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소통하려는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소통 전략이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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