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위탁운용사 평가기준 변경…중소형주 볕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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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아시죠? 거기(국민연금)는 ‘볼드모트’에요.” 운용사 관계자에게 국민연금의 평가체계 개편안에 대한 평가를 묻자 돌아온 첫 마디다. ‘볼드모트’는 조앤 롤링의 인기 마법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사악한 마법사다. 국민연금은 운용사엔 그만큼 ‘절대 갑(甲)’이다. 11월 말 기준으로 46조원(국내 주식)에 이르는 돈을 운용사들에게 나눠줘 굴리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연금 위탁운용사이냐 아니냐가 시장에서는 그 운용사의 실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이런 국민연금이 최근 새로운 위탁운용사 평가 기준을 발표했다. 개편안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평가 기간을 장기로 늘렸다. 펀드 성과를 평가할 때 단기인 1년 수익률 지표를 삭제하고, 3년과 5년 수익률만 반반씩 보기로 했다. 현재는 1년 수익률이 20%, 3년과 5년 수익률이 각각 40%씩 반영된다. 3년과 5년에 최근 1년이 포함됐다는 걸 감안하면, 현재 성과 평가에 1년 수익률이 차지하는 비중은 40%를 웃돈다는 얘기다.

1년 수익률 대신 3년·5년 성과 기준
포트폴리오 일관성 등 질적 평가도
“1년 단기 수익률 나쁜 운용사에
개편안대로 계속 맡길지는 의문”

강면욱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는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성과를 높여가는 것을 지향한다”며 “이번 개편은 국내 위탁 운용사들이 스스로 제시한 목표 달성을 위해 고유한 역량을 꾸준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황세운 자본연구원 자본연구실장은 “국민연금 기금은 대표적인 장기 투자 목적의 돈이고, 그렇다면 성과 평가도 그에 맞게 장기로 해야 한다”며 “단기 업적주의를 지양하는 이번 개편 방향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연금은 이를 위해 펀드의 투자 전략과 포트폴리오의 특성을 질적으로 평가하기로 했다. 스타일 전략, 포트폴리오의 일관성, 종목 리스크 집중도 등을 평가 지표에 포함시켰다. 강 본부장은 “대형주에 투자한다고 돈을 받아놓고는 단기 수익률을 높이겠다고 대형주 비중을 낮추고 코스닥 비중을 80%까지 높이는 식의 운용은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쏠림현상 개선을 위해 한시적으로 도입됐던 ‘벤치마크(BM) 복제율 가이드라인’(BM 구성 종목을 그대로 담아야 한다는 기준, 예를 들어 가치형은 60% 이상)은 없애기로 했다. 새로 도입하는 질적 평가 기준을 통해 운용의 일관성은 담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앞서 지난 7월 국민연금이 BM 복제율 가이드라인을 내놓자, 그간 지나치게 중소형주를 많이 편입한 매니저들이 이들 종목을 내다 팔면서 중소형주 시장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BM 복제율 가이드라인에 따라 대형주만 고집했던 기관 투자가들의 매매 방식에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달 초 국민연금이 BM 복제율 가이드라인을 폐지하고 새 평가 체계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이 알려지면서 기관의 매수세가 집중되면서 중소형주 및 코스닥 시장에 간만에 볕이 들기도 했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엄격한 복제율 잣대가 아니라 질적 평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매니저가 자유롭게 종목을 사고 팔 수 있는 여지를 뒀기 때문에 소외받던 중소형주가 주목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다만, 이 개편안이 그대로 지켜질지는 우려된다. 한 운용사 대표는 “당장 국정감사에서 ‘왜 수익률이 나쁜 운용사에 돈을 맡기느냐’고 추궁을 받으면 그걸 이겨내고 개편안을 고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황세운 실장은 “누가 와도 장기 성과를 강조하는 원칙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며 “투자위원회 등에서 (쉽게 고칠 수 없는) 규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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