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의 신대륙 중앙아시아] 上. 키르기스스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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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미국과 러시아가 거대 게임(Great Games)을 재연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소련의 일부였다가 독립한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5개국이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다.

중앙아시아는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더구나 인접한 카스피해가 석유.가스 자원의 보고로 확인되면서 기존의 영향력을 지키려는 러시아와 진출 확대를 노리는 미국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마나스 국제공항. 끝없이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초원 위에 지어진 아담한 비행장이다. 우리나라 지방공항의 규모지만 키르기스스탄이 1988년 중앙아시아 최대의 현대식 공항을 만든다는 야심 아래 새롭게 단장했다.

이 나라의 전설적 장군의 이름을 딴 이 공항의 콘크리트 청사는 기대 이상으로 세련돼 보인다. 바로 이 마나스 공항엔 미국의 대(對)아프가니스탄 테러 작전을 지원하는 다국적군 공군기지가 자리잡고 있다.

9.11 테러 당시 순직한 뉴욕시 소방서장 피터 주니어 간시를 기려 '간시 기지'로 이름 붙여진 이 부대는 15만㎡ 크기다. 공항청사 앞쪽에 설치된 다국적군 막사 입구 주위엔 모래 주머니로 만든 폭 1m, 높이 2~3m쯤 되는 방어벽들이 겹겹이 설치돼 있다.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한다'. 경계를 서는 중무장 초병 3명의 옆에 붙어있는 영어와 러시아어로 된 큼지막한 안내문이 방문자를 압도한다. 부대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맡기고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한다.

콘크리트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캠프 안에는 야전 텐트 3백여채가 줄지어 서 있다. 전체의 90% 정도는 미군이다. 그러나 뉴질랜드.덴마크.네덜란드.이탈리아 등에서 온 병사도 있다.

주둔 병력은 모두 1천5백여명. 다국적군의 일원인 한국 동의부대 대원 43명도 이곳에서 의료지원 활동을 벌인다. 공항 청사 뒤편 활주로 부근엔 F-15, F-16, F/A-18 등의 전투기와 C-5, C-17 등 대형 수송기 20여대가 나란히 서 있다.

마나스 공군기지에서 30여㎞ 떨어진 비슈케크 동북쪽의 칸트 공군기지. 멀리 눈덮인 천산 자락 앞의 넓은 초원에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는 기지의 크기는 대략 10만㎡. 마나스 공군기지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철조망으로 엉성하게 담장이 쳐진 비행장 한편엔 IL-76 수송기 1대가 거대한 동체를 드러내고 쓸쓸하게 서 있다. 전투기 몇대가 녹음이 우거진 울타리 뒤에 숨어있다. 사진을 찍으려 접근하자 경계를 서는 초병들이 손을 저으며 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소련 시절 제3세계 국가 조종사의 훈련장으로 이용되다 소련 붕괴 뒤 문을 닫다시피했던 이 기지는 요즈음 독립국가연합(CIS)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다국적군을 맞기 위한 새 단장이 한창이다. CSTO는 러시아.아르메니아.벨로루시.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 CIS 소속 6개국이 지난해 결성한 안보기구다.

다국적군의 주력인 러시아는 SU-25, SU-27 등 전투기 12대와 4백~5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공군을 이번달 중 이곳에 배치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전투기 20여대와 6천여 병력을 주둔시킨다는 계획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 미군이 칸트 기지까지 임대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SU-25 전투기 2대를 서둘러 칸트에 배치시켜 '말뚝'을 박았다. 마나스 기지와 칸트 기지. 날아 오르면 한눈에 들어오는 지척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마치 냉전시대로 돌아간 듯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미군 장기 주둔 계획=미국은 최근 2001년 12월 한시적으로 설치했던 마나스 공군 기지를 테러전이 끝나도 계속 유지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군은 이를 위해 지난 4월 키르기스스탄 정부로부터 현재 주둔 중인 위치 근처에 약 3백만㎡의 땅을 새로 임대, 이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유럽 주둔 미군의 일부가 이곳으로 이동 배치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현지 한국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해 미군은 올해 초부터 비슈케크의 학교.병원.고아원 등에 대한 지원도 대폭 늘렸다.

또 혹시 있을지 모를 현지 주민들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미군들의 외출도 제한한다. 그러나 미군과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미군의 장기주둔을 부인하고 있다.

마나스 기지의 미군 공보장교 앨런 헤리티지 대위는 "새 기지 건설에 대해 어떤 명령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키르기스스탄 정부의 지엔백 쿨루바예프 외무차관도 "미군 장기 주둔과 관련한 공식 요청을 받지 못했으며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의 대테러전이 끝나는 대로 철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미군의 마나스 장기 주둔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애써 마련한 군사 교두보를 미국이 쉽게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이다. 비슈케크의 로만 쇠가이는 "미군이 장기 주둔하게 되면 돈벌이가 생길 것이라며 벌써부터 주민들이 기대에 부풀어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힘겨운 대응=지난달 초로 예정됐던 러시아군의 칸트 기지 주둔은 이번 달로 미뤄졌다. 기지 운영 비용을 놓고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 정부의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2백30만달러에 이르는 시설보수비나 기지 운영에 따르는 비용을 누가 맡느냐는 문제 때문이다.

경제 사정 때문에 돈을 낼 형편이 못 되는 키르기스스탄과 다른 다국적군 소속 국가들의 처지를 고려하면 러시아가 떠안을 수밖에 없지만 얼마 전 경제적 이유로 쿠바와 베트남의 군사기지를 폐쇄한 처지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중앙아시아마저 내줄 수 없다'는 절박감이 크렘린으로 하여금 칸트 기지 건설을 강행하게 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의 과격 이슬람 세력 확산 방지▶국제 테러리즘 및 마약 밀매에 대한 대처 등을 칸트 기지 건설 이유로 내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군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7월 초 여름 휴가차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의 이해가 걸린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미.러의 군사대결은 키르기스스탄을 넘어 중앙아시아 다른 지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내 미 공군 주둔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는 타지키스탄 내 제201 기계화 사단의 규모를 확대하고 영구 군사기지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타지키스탄에 10억달러 차관을 제시하며 러시아의 기지 건설을 거절하도록 부추긴다는 러시아 언론의 보도도 있다.

19세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영국이 벌였던 거대 게임이 주역만을 달리한 채 다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유철종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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