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싸움속 재산 빼돌리기 경쟁|이전투구식 범양 박회장-한사장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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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자살로 표면화된 범양사건은 박회장과 한상연 사장간의 경영권 다툼과 재산빼돌리기 경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창업주인 박회장의 입장과 박회장의 총애(?)로 자란 전문경영인 한사장의 상반된 입장에서 80년대 들어 회사의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불화를 빚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돼 파국을 일으켰다는 후문.
박회장과 박회장의 배려로 입사14년만에 사장으로 발탁된 한사장 간에 틈이 벌어진 것은 해운불황이 닥친 80년대 초. 그 후 84년 정부의 해운합리화조치로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부채가 늘어나자 서로의 비행을 공공연히 물고 늘어지는 이전투구식의 경영권싸움과 재산 빼돌리기가 시작됐다.
○…사재를 회사에 내놓은 박회장은 회사의 경영권도 실질적으로 되찾으려는 노력을 했으나 이 노력도 한사장측에 의해 봉쇄됐다. 투서사건으로 대립이 극에 달한 두 사람은 지난달27일 주주총회가 끝난 뒤 박회장실에서 만나 박회장이 한사장의 퇴임을 요구하자 한사장이 박회장의 멱살을 잡고 싸우는 사태로까지 번졌다는 후문.
이 사건은 한사장이 박회장 방으로 찾아가 『이번 주총에서 거론된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라』며 퇴진을 강요, 박회장이 『무례하다』며 핀잔을 주자 한사장이 박회장의 멱살을 잡았다는 것.
이 「충돌」은 멱살을 잡힌 채 벽쪽으로 끌려간 박회장의 고함소리를 듣고 임직원들이 달려와 「수습」됐으나 이 사건 후 두 사람은 회사복도에서 마주쳐도 외면할 정도로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었다는 것.
○…「멱살잡이 사건」이 일어난 뒤 한사장은 2주간 회사를 무단 결근, 범양의 「4인방」 으로 통하는 방석훈 부사장·허성길 전무·이문치 상무 등과 함께 『박회장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맡아야한다』는 내용의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는 것.
○…이에 앞서 박회장측도 한사장의 불어나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82년 부장급 8명으로 하여금 한사장 집에 찾아가 퇴임을 요구하게 했으나 결국 한사장에게 몰려 대량 축출되는 결과를 빚었다. 이른바 「8인방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8명의 핵심부장들이 한사장의 퇴임을 요구하며 박회장에게 사표를 낸 것으로 결국 한사장의 반발로 8인방은 물론, 이에 동조했던 과장급까지 모두 40여명이 무더기로 내쫓겼다.
○…한사장은 현재 본부인·부모가 살고 있는 여의도의 아파트2동과 내연의 처 명의로 되어있는 서초동 D빌라외에도 서울 반포동에 대지93평의 땅을 최근 사들인 것으로 밝혀져 숨겨둔 재산이 더욱 많을 것으로 주변에선 추측.
반포동 땅은 고급주택가의 한 복판에 자리잡아 주변부동산업자들에 따르면 싯가 2억원을 홋가한다는 것.
이 땅에는 재미동포인 이모씨가 80년 건평70평의 2층 양옥을 신축했으나 85년4월 한사장이 건물을 제외한 대지만을 사들였다는 것.
○…범양상선 박회장과 한사장의 불화는 박회장 자살직전에 극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일 이후 각각 2차례씩 감독관청인 해운항만청에 불려온 이들은 서로 「상대방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는 것.
항만청 당국자는 이때 마다 박회장에게는 『이미 범양은 박회장 개인재산이 아니다』고 했고, 한사장에게는 『그럼 그만 두라』며 두 사람이 같이 일하도록 종용했으나 화해를 시키지 못하고 지난 20일 두 사람을 함께 부르러하던 참에 19일 박회장이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아쉬워했다.
○…지난2월 해운합리화 조치 때 개인재산은 20억원밖에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던 박회장은 정부측의 압력으로 결국 1백억원을 내놓게 됐는데, 그 조건으로 한사장 축출을 내세웠었다.
감독관청인 해운항만청으로서도 『그것은 당연히 이사회장의 권한이 아니냐』며,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래서 지난 3월27일에는 박회장이 한사장에게 이를 통보했다가 결국 두 사람이 멱살을 잡는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숨진 박회장이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말미에 「함사장님 죄송합니다」라고 썼을 정도로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미륭상사 함성용 사장(74)은 『박회장이 죽던 날 세 번씩이나 내게 전화를 했다는데 회사직원들과 골프장에 나가있어 통화가 안됐다』며 『그날 서로 연락만 닿았어도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함사장은 『박회장이 자살하기 전날 통화 할 때 목소리가 침울했던 것이 평소와 달랐다』며 『그때 이미 자살을 결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공직에 있다가 골프친구로 친분을 맺어 17년 전 미륭상사를 맡은 이후 박회장과 가정적으로도 각별한 사이였다는 함사장은 『지난6일 박회장으로부터 집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경영상태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고 한사장과 불편한 관계에 있다는 것도 다른 사람을 통해 알고는 있었으나 두 사람 사이가 그 정도로 심각한지는 몰랐다』며 『박회장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기업을 일으켰지만 인재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고 뚝심도 부족한 경영스타일 때문에 실패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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