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사」의 사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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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라이사」를 처음 본 세계의 매스컴들은 깜짝 놀랐다. 갈색머리를 짧게 자르고 마춤복을 단정하게 입은 소녀처럼 날씬한 모습.
지금까지 신문의 토픽 난 같은데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뚱뚱하고 우중충한 소련지도자 부인들의 프로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데일리메일지는『붉은 스타가 탄생했다』는 제목으로 그녀의 동정을 낱낱이 보도하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인「고르바초프」의 인상까지 바꾸어 놓았다.
「레닌」의 부인이었던「크르프스카야」말고는 소련지도자의 부인이 대중 앞에 나선 일이 별로 없다. 동양적 미덕이라기 보다는 사람 앞에 내세울「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젊어서 고생하느라 제대로 교육도 못 받았을 것이고, 더구나 몸매나 옷 같은데 신경을 쓸 여유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사」는 모스크바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남부러시아 스타브로폴의 집단농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텔리 여성이다. 현재는 모교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라이사」가 최근 모스크바에서 사치스럽고 허영심 많은 여성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시중에 나도는 비밀 비디오테이프에 그녀가 유행하는 옷감과 보석을 산 후 온 몸에 치장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한다. 또 필름 내용 중에는 85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과 85년 프랑스 방문 때 유명 상가에서 쇼핑하는 모습도 들어있다.
그러나 프랑스에 갔을 때「라이사」의 인기는 영국의 그것에 못지 않았다. 이때는 마춤복이 아니라 세련되고 우아한 의상을 매일 갈아입고 나타나 파리지엔들을 매혹시켰다.
그녀는 피에르 카르댕 살롱에 들러『내 모습이 어떠냐』고 물었는가 하면 이브 생 로랑 가게에 가서는「로랑」이 준 파리 향수보다 오피엄이 더 좋다고 말해 즉석에서 한벌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심지어「미테랑」프랑스 대통령의 새로 단장한 집무실을 둘러보고는『나는 이 방면의 초보자이니 좀 가르쳐 달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신문들은「라이사」를 가리켜 사교용「비밀무기」, 또는「매력적인 여 대사」라고 대서특필했다. 이만한 외교가 어디 있겠는가.
미 듀크대학의 소련전문가「제리·하프」교수는 「고르바초프」가 부인을 자주 TV앞에 내세우는 것은 소련인들에게 새로운 지도층의 모습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구두를 몇 켤레나 가졌는지는 모르지만「라이사」의 사치와 허영은 어쩌면 폐쇄사회에서 개방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진통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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