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과 서양인의 소굴 42번 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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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국의 공항게이트에서 헤어질 때, 남은 사람은 떠나는 사람이 안보일 때까지 마냥 서 있고 떠나는 사람은 그만 돌아가라고 자꾸 뒤돌아보며 손짓하는 그 따뜻한 혈육의 정이 어찌 그토록 야릇한 감정에 젖게 하는지….
내 수중에 트래블러 체크만 남아있는 줄 아는 막내가 『어머니 기내에서 스카치 언더럭스를 사드십시오』하면서 꺼내 줘 부담없이 받은 10달러가 그렇게도 흐뭇할 수가 없었다.
6시간을 비행하고 깜깜해진 뉴욕공항에 내리니 유행에서 한물간 검은 코트를 걸친 장녀가 마중 나와 있었다.
버스를 타고 맨해턴 정류소에서 내렸다.
낯익은 아파트건물이며 낯익은 2중문과 계단을 밟아 딸의 아담한 방에 드니 안엔 여전히 작품이 쌓여있어 좁았고 침실 문짝엔 등신대 크기의 「스포크 박사」포스터가 그대로 붙어있었다.
『스포크 박사 안녕!』
몇 해전 나는 자다가 깰 때마다 「스포크 박사」 때문에 놀랐지만 만능박사 우주인 미스터 「스포크」가 문지기 해 주는 것도 무방하리라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TV영화 『스타트렉』 에나온 지구인의 피가 섞인 「발칸」이라는 별나라 왕자인데 좋은 일을 하는 박사였다.
세월은 잔인한 것
「스포크」역인 「레오나드·니모이」가 감독·출연한 영화 『스타트렉』 제3편은 개봉되자마자 미전역에서 흥행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상하게 분장한 그의 눈썹, 큰 귀 때문에 그저 「귀」라고 하면 서로 「스포크」로 통했었다.
내 숙명이 40대부터 중성 행세를 하며 살아왔고 장녀 역시 운명인지 자의인지 나와 같은 길을 밟게 된데다 혈액형도 같은 B형의 소유자이고 보니 행인지 불행인지 어찌 생각하면 인생의 고독을 스스로 짊어진 셈이 됐다.
탁자 위엔 「모아」라는 길다란 담배와 그 옆에 진분홍색 라이터가 놓여 있고 큰 접시에 과일들이 보기 좋게 쌓여 있었다. 노란 바나나는 다른 과일과 함께 구색은 맞지만 언제부터인지 나는 파인애플과 바나나·감 같은것이 싫어졌다.
오랜만에 ABC텔레비전을 틀어보니 마침 뉴스 시간으로 옛날에 봤던 앵커맨들은 많이 사라지고 「어니」라는 사람만 남아있었다. 몇 해 사이에 목 주름이 눈에 띄게 늙어 보여 새삼 세월의 잔인함을 느끼게 했다.
벽엔 사진틀이 많이 걸려있었다. 어느 자식집을 가도 핵가족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결혼식 기념사진이라든가 자기네 가족사진이 몇 가지 걸려있거나 책상 위에 세워져 있기 마련인데 여긴 달랐다. 돋보기를 쓰고 이런 사진도 있었던가 싶은 먼 옛날의 할머니 어머니, 어린시절의 동생들, 그리고 암캐 꽃순이의 강아지 때부터 성장해 가는 모습, 죽은 이모가 저를 안고 찍은 사진 등 오만가지 사진들이 틀안에 붙어있어 때로는 그립고 때로는 오장육부가 녹는 설움이 복받쳐 부질없이 눈물지어야 했다.
얼마나 속으로 울었으면 이런 환경을 만들어놓고 비단에다 꼭꼭 붓을 찍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하지만 그 아이는 뉴욕공예협회회원이고 1년에 두세번 개인전과 그룹전에 초대받아 보람을 느끼고 좋은 친구들도 있다.
「블랙」과 「븐라크」
어느 날 혼자 있을 때였다.
옆방에서 뭔지 지극히 가벼운 바시락소리가 들려와 살며시 들여다보니 담요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실내가 더워 조금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당황한 나는 『땍 가아. 아니 저어, 투우 고오 홈…하우스…』했더니 고양이는 날렵하게 창문을 뛰어 넘어갔다.
맨해턴은 도보교통이 편리한 곳이지만 옛날에 낭만을 누렸던 42번가는 흑인과 부랑인의 소굴이 돼버려 대낮에도 오싹하고 더러웠다. 심지어는 길바닥에 선채로 줄줄 오줌싸는 뚱뚱보 흑인녀 까지 있어 놀랐었다. 그런 열등감 때문인지 백화점등에서 일하는 예쁘장한 흑인여성은 물건을 찾다가 무심코 저쪽 「블랙」을 내봐달라고 하면 안색이 달라지면서 한참만에 『오오, 브라크』하면서 음색을 돌려 말한다.
언젠가는 혼자 거리를 지나는데 백인주정뱅이가 끈질기게도 붙어 말을 걸며 따라와 난처했는데 지나가던 약간 껄렁한 젊은 혼혈 흑인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이 사람은 내 와이프다』라고 주정뱅이를 쏘아보면서 보호해줬을 때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범죄소굴 타임스퀘어의 거대한 지하철역 상점가엔 경찰서까지 배치되어있고 그 옆에 이발소와 미장원이 나란히 있는 것도 뉴욕답고 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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