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 레터] 빙민주의의 빚잔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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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예정된 전국 규모의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시위를 앞두고 여야는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권력공백의 혼돈이 약 한 달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장기 농성, 새누리당은 계파 분열, 야권은 공조 부재 상태입니다. 국정 공백을 어떻게 메우고, 리더십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큰 논의가 진전되질 못하고 있습니다. 큰 줄기가 탄핵으로 모아지는 데만 해도 이미 긴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지금은 그 각론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큰 개혁을 위해선 큰 칼을 벼려야 할 텐데, 너도나도 면도칼 뽑아들고 설치는 형국입니다.

그러다 보니 광장의 목소리는 정치에 반영되거나 소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대중의 단절은 점점 깊어갑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판입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들은 답답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쌓여만 가는 무력증, 허탈감, 불만, 분노…. 그 앞에서 청와대는 숨어버리고, 여의도는 갈팡질팡합니다. 정치는 곧 경제를 타격합니다. 경제심리는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얼어붙었습니다. 이미 박 대통령 지지율은 사상 최저치인 4%로 내려앉았습니다. 마치 얼마 안 남은 휴대폰 배터리 눈금 떨어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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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대통령은 물론이고 여야 정치인 모두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다들 민심은 천심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총결산이 사상 최대의 촛불시위입니까. 결국 국민 팔아 자기 정치를 해온 것 아니냐는 겁니다. 어떤 학자는 빙민(憑民)주의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매주 반복되는 촛불시위는 빙민주의에 대한 파산선고이자 빚잔치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리의 함성은 뉴스룸 안으로 흘러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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