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값 인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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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상에, 의사가 그래 멀쩡한 사람을 폐결핵환자로 만든단 말이요?』
H운수소속 트럭운전사 이모씨(56)가 분노에 상기된 얼굴로 연방 삿대질을 해댄다. 앞엔 역시 벌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의사님들.
이씨는 자신도 모르는 건강진단에서 졸지에 폐결핵 중증환자로 바뀌어 회사에서 쫓겨날 위기까지 몰렸었다. 『엉터리 진단서라지만 아픈 사람을 정상인으로 속이는 것은 보았어도 정상인을 환자로 모는건 처음 보았네. 그래 당신네들이 의사란 말이요?』 이씨의 분통에 의사님들은 대꾸도 못하고 방바닥만 쳐다본다.
16일 상오11시 서울시경 경제계. 운수회사 상대 허위건강진단서 대량발급사건 피의자로 불려온 4명의 의사와 참고인 진술차 나온 운전사들의 대좌.
『큰 일이 없을테니 도장만 찍어달라기에 도장을 내주었는데 그만…』
이런 짓을 어떻게 했느냐는 조사관의 질문에 한 의사가 궁색한 변명을 한다.
1장에 1천원씩. 박리다매 백지건강진단서에 도장을 찍어준 의술.
S산업 문모씨(34)는 자기도 모르게 만들어진 건강진단서에서 실제 키 1백68cm·몸무게 61kg이 키 1백79cm에 몸무게 73kg의 거구로 뒤바뀌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장모씨 (당시 58세)가 한달후인 11월에는 버젓이 건강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촌극도 빚어졌다.
실제 건강진단을 할 경우영업에 차질을 빚고 직업병으로 판명되면 의무적으로 고쳐주어야 하는 부담까지 지게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 병원측과 짜고 운수회사는 가짜 진단서를 대량 작성, 노동부에 허위보고를 해왔다.
운전사의 삿대질 앞에서 고개를 못드는 인술.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인 황금만능 우리사회의 또 한토막 축소판이었다. <정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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