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간의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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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일 상오11시40분 한국외국어대 서울캠퍼스 대운동장. 교수·학생·학부모·내빈 등 5천 여명이 참석한 87학년도 입학식장.
『식민지반도의 학생이 불의를 떨치고 일어서면 과격분자가 되고, 정의를 외치면 용공분자가 되는 현실을 타개합시다. 향락적인 대학생활을 버립시다』
총학생회장 손 모군(23·법학4)의 신임생 환영사는 형식을 갖추지 못한 채 절규로만 들린다.
학생대표가 등단, 말문을 열려는 순간 황병태 총장을 비롯, 단상에 앉아있던 1백 여명의 교수가 일제히 퇴장해 버렸다.
『학생대표의 인사말은 교수가 퇴장하는 조건으로 허용됐어요. 식순에도 없는 인사말을 기어이 하겠다기에 그렇게 약속하고 허락했거든요』
학교측의 해명.
『그런 약속은 있을 수도 없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중에 어떻게 교수님들이 퇴장할 수 있습니까』 학생들의 볼멘 소리.
1주일 전부터 학생대표의 환영사를 넣어 달라느니, 안 된다느니 옥신각신하던 식순에 총학생회장의 인사말이 들어간 것은 식이 시작되고 10분이 지난 이날 상오11시10분쯤.
60여명의 학생이 막무가내로 식장에 몰려들었고, 마지못해 학교측은 폐회사 직전에 이를 허용했던 것.
어떻든 이번의 외대 입학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줬던 지난달 26일 서울대의 등돌린 졸업식만큼이나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교수들이 식장을 떠날 때는 그만한 이유야 있었겠지만 대학이 이렇게까지 시대상황의 아픔을 앓아야하는지에 생각이 미쳐 기쁨보다 서글픔이 앞선다』는 한 학부모의한숨이 다 끝난 식장에 여운을 남겼다. <길진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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