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랑인」에게도 인권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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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인권이란 영어로는 human right다. 이 용어는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가치와 존엄 (worth and dignity of individual) 을 상징하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말로서 이개념은 보편성과 포괄성을 전제로 하며 인간이면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도덕과 정의적 차원에서 사용되는 용이다. 이 개념은 개인의 사회· 경제적 지위와 신분의 차이에 따라 그 개념의 적용 정도가 다르게 운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지난 몇주동안 모든 일간 신문에서는 경찰수사관의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군의 인권에 대한 각계(정치·법조·종교· 민간단체)를 대표한 반응들이 나름대로 소개되었고 이에 대한 관계정부 당국에서는 고문을 공공연히 자행한 정신병자와 같은 야수적 행위의 근절에 대한 제도적 장치 등을 운운하였고 경찰관계자의 책임의 소재까지 문책되었다.
우리가 잊고 있는 현실은, 아니면 유린당한 인권에 대한 타성의 탓에서인지, 그늘진 곳에서 버림받고, 대변 받지 못하며, 사회적 도움을 갈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이다. 지난 몇주 전에 부산 형제원 소속의 한 부랑인이 혹독한 노역의 결과로 사망하여 버려져있는 그 인권에 대해서는 사회적 반응이 더디었다.
그곳에서 1백80명이 강제노역을 당해봤으며 상당수가 폭행의 두려움에 떨고 있고 그중 한사람이 폭행의 결과로 사망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사회각계의 반응은 뒤늦게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버림받은 인권이라 생각해 관심이 늦었던가 보다. 몰매 맞아 죽은 그 부랑인의 인권보다 그 시설운영책임자의 거금횡령이 더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다.
박군의 인권처럼 어느 정당의 정치인들이 철야농성 또는 . 시위와 집회의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그 부랑인의 인권을 부르짖은 사람은 적었다. (세속적인 표현으로) 부모를 잘못 만났고 사회·문화적 혜택을 박탈당해 정상적인 인간성장의 과정을 밟지못하여 탈선된 지극히 불상한 자들의 복지와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적다. 우리사회는 인권을 분명히 차별하여 다루고 있다.
정치적 측면이외의 다른 사회·문화부 면에서 고문이상의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인권에 대한 중대성과 이를 대변하는 사랑은 아무도 없다.
「복지 사회」란 구호가 왜 생겨났는지 모른다. 뭇 사랑들이 복지의 개념도 이해 못하면서 『복지·복지』 떠들고 있다.
복지사회의 실현 없이 선진민주화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복지 개념의 근원을 흐르는 개념은 바로 그 인권개념인 것이다.
이 인권개념은 편협되고 사회적 신분의 정도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 강조의 정도가 달라지는 인권의 개념이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양도할수 없는 권리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정치적 관심거리가 될수 있는 사건에만 전시효과적·정치적·충동적으로 와그르 떠들다가 열이 식으면 사그라져 없어지는 식의 사회적 의식구조와 풍토 속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의 기대를 할수 없다.
인권문제에 있어 사회적 관심이 요청되는 부면은 경찰수사 분야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을 집단으로 수용·운용하는 기관에서는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인권이다.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는 기도원, 범법자를 수용하는 국가통제기관, 생산역군들이 일하는 산업현장등.
인권의 문제를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다룰때 발생하는 사회적 결과는 사회제도 운영의 내·외적 현실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어 정치위주·정치 지향적인 사회의식만이 성행하는 사회가 될것이다.
우리가 만일 사회적 안정성과 문화적 연속성 때문에 인간의 타성, 즉 대부분의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규범에 무비판적인 승인만을 요구한다면 선진문명권으로 향하는 우리들에게 활력과 창의력을 억제하는 경우가 되겠다. 혹자는 현 세대의 사회를 특징짓는 거대한 불안정성과 심한 불연속성을 지적함으로써 대답할지 모른다. 안정성과 연속성의 오래된 유형은 오늘날과 같은 고도산업시대에서는 이미 상실되었다.
오늘의 사회가 거대한 타성이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였던 과거의 시대로 돌아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습이라는 덩어리는 오래전에 부서졌다. 유일한 희망은 관습적 타성없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케니스턴」의 한 글귀가 생각난다. 『정의없는 자비는 과장되고 감상에 흐르기 쉽고, 자비없는 정의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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