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없는 정치의 질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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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오는 7일로 예정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를 둘러싼 여야의 강경대치로 정국은 다시 긴장으로 줄달음 치고 있다.「원천봉쇄」와 「부분허용」을 놓고 대책마련에 부심하던 정부·여당은 결국 추도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당일의 현장차단을 포함, 재야단체에 대한 압수수색 조치 등 추도회 자체를 원천봉쇄 한다는 강경방침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박군 고문치사사건의 성격상 원천봉쇄는 말하자면 하지하책이다. 작년 11월29일 신민당의 직선제개헌추진대회를 봉쇄하던 때와 비교해서 명분이 훨씬 약한 것도 사실이다. 정부·여당이 이를 모를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강경의 길을 선택한데는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민정당은 이번 사건을 신민당이「민중봉기」의 기회로 착각, 재야세력과 연계하여 박군 추모행사라는 이름아래 전국 동시다발의 선동집회를 획책하고 있다고 결론짓고 강경대응으로 방침을 굳힌 것 같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까닭은 거듭하는 말이지만 정치가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당초 경찰과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국민의 의구심을 한층 부채질한 것은 제쳐두고라도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가 정치적인 여과기능을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거기에는 여당의 책임과 함께 야당도 면책을 받을 길은 없다.
사건이 일과성으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중대하고 심각하다는 점은 누누이 지적해온 바다. 정부·여당이 신속한 문책인사와 「유감표명」등으로 어느 정도 성의는 보였다지만 국민이 받은 충격과 분노에 비해 정치적 대응은 너무도 미치한 것이었다.
야당이 국회안 인권특위 구성을 거부하고 대뜸 장외투쟁을 선택한 것에도 문제는 있다.
우선 특위구성은 해놓고 이를 바탕으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쪽이 보다 현실적인 방안이었다는 지적이 따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부·여당은 이번 추도회를 못 열게 하는 이유로 양외선동으로 난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5·3인천사태를 능가하는 불상사가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 단계로서는 어디까지나 「예측불허」의 예측이지,「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신민당도 이점에서는 만약의 사태가 돌발하면 결국 야당의 심각한 부담이 되기 때문에 평화적이고 질서있는 행사로 끝내도록 책임지고 노력하겠다는 성의있는 자세를 보여 주어야한다.
헌법상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는 국민의 표현의 자유의 한 형태이고 언론의 자유를 보충해주는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이 자유는 국민 기본권가운데 가장 핵심에 해당하는 자유이어서 하위법인 경찰법상의 차원에서 이 자유의 본질을 제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오히려 국가공권력은 국민의 이 같은 소중한 자유를 보장하고 보호해야할 책무가 있다.
정부가 이 자유의 보호보다 사전에 봉쇄함으로써 오히려 혼란이 야기되고 격분한 심리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진전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어떻든 현재의 상황은 개헌정국의 결정적 분수령을 향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느낌이다.
정치가 뒤로 물러나고 공권력과 재야세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숨막힐 듯한 긴장상태는 누구를 위해서건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민정당은 설혹 공권력에 의한 원천봉쇄가 성공한다 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직 시간은 있다. 가장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대국적으로 살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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