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호기심「미팅」이 나쁜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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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정을 넘긴 한밤중. A전화상담기관의 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구정을 며칠앞둔 지난1월하순.
『저, 집을 나가고 싶어요』10대 소년의 볼멘 소리.
『얼마나 괴롭기에 가츨하고 싶었을까요』상담원 N씨(35)는 달래듯 부드럽게 받았다.『엄마하고 전혀 통하지 않아서 못참겠어요.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처음에 머뭇거릴 때와는 달리 중학생은 봇물이 터진듯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연합고사가 끝난뒤 십십풀이로 몇차례 미팅좀 했을뿐예요. 진작부터 다른 친구들처럼 예쁜 여학생을 사귀고 싶었지만 참아왔는데…]
K군 (15. P중3년) .그날 미팅에서 돌아온 길이었다.
지난1개월 남깃 사이에 네번째. 처음으로 말로만 들어온 「007미팅」이란걸했다. 낮12시. 친한 친구 5명이 약속장소인 광화문의 K서점앞으로 나갔으나 상대편 여학생들중 1명이 못나오는 바람에 짝이 없었다. 소위「피보기미팅」이 돼버린 셈.「짝을 찾은 친구들 한테서 공짜로 햄버거만 얻어먹고 돌아올뻔」했다.
그런데 주선했던 친구가 비상수단을 썼다. 어디론지 전화를 걸더니 의기양양해하며 으쓱거렸다.
『1시간만 기다려.하늘색 헤어밴드를 맨 여자애가 이리로 나올테니까』
제비뽑기로 둘씩 짝지은 친구들은 우선 여의도 광장으로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타러간다며 우르르 몰려갔다. K군은 서점에서 건성으로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하오1시30분. 청바지차림의 소녀가 하늘색 헤어밴드를 매고 나타났다. 친구가 일러준대로 「고추잠자리 있어요?」라고 하자 「허공 테이프뿐예요」란 응답. 확인이 끝났다. 좀 쑥스러우면서도 여느 미팅때보다 흥미롭다고 느끼며 K군은 물었다.
『우리 어디갈까?』
『어머, 여지껏 그것도 생각해두지 않구』 핀잔석인 여학생의 말에 K군은 용기를냈다. 소녀 (15. Q여중3년)는 자기소개를 했다.
『M극장 영화가 괜찮다던데…』
여학생이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K군은 내심 긴장했으나 의외로 선선히 따라나섰다. 곧 시작되는 영화는 이미 매진. 하오5시가 지나 시작되는 3회상영을 보기로 했다.
시간을 메울겸 찾아간 곳은 볼링장. 볼링2게임에 든 2천4백원은 여학생이 냈다.
영화값 5천원은 K군이 냈으니까 이번엔 당연히 자기차례라는듯. 쉬는동안 여학생은 종이컵에든 주스 두잔을 사왔다. K군은 저녁값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속에 남은돈을 계산해봤다. 아직 5천원하고도 동전이 몇개.
돈이 넉넉지 않으면 영신경이 쓰여서 재미가 덜하다는 지금까지의 경험때문에 K군은 집을 나서기전 어머니 핸드백에서 만원짜리 1장을 슬쩍 챙겼던 것이다.
영화가 끝난뒤 분식센터에 마주앉아 볶음밥과 자장면을 먹으면서 K군은 여학생을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너무 늦었다고 서두는 여학생을 역촌동 집부근까지 바래다준 K군이 상도동의 자기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오11시가 넘어있었다. 어머니의 「잔소리」쯤이야 짐작했지만 이날은 「잔소리」정도가 아니었다. K군이 꺼내간 1만원이 문제가 됐다.
『벌써 몇차례나 2천원, 천원씩 축내는걸 알면서도 돈이 너무 궁했나 싶어서 그냥뒀지만,이번엔 도저히 안되겠다. 죄다 말해봐!』
처음엔 딱 잡아뗐으나 아버지(40. 식품점경영)까지 가세해 다그치는 바람에「K군은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문제가 더욱 커졌다. 이제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뭐야, 미팅? 맙소사!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가 바로 우리집에 있었구나』
어머니는 기막혀했고, 아버지도 노발대발. 뺨을 연거푸 후려갈긴 아버지는 1주일 외출금지에다 매주 5천원씩이던 용돈의 2주일간 지급중지를 선언했다. K군은 무엇보다도 사흘뒤 다시 만나기로했던 여학생과의 약속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미팅도 이해 못하는 부모와 어떻게 살아요?』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거의 당연시 되고있는 미팅을 부모들이 백안시함으로써 빚어지는 무수한 갈등중 하나의 사례를 직면한 상담원N씨.
『미팅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면 부모님과 아주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화해 볼 수도있지 않을까요?』 『요즘 유난히 한가하고 심심하다면 사회단체에서 열리는 청소년 프로그램들중에 흥미가 끌리는게 없는지 알아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서도 사춘기 소년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밀어닥치는 특유의 호기심과 갈등을 소화하고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N씨는 긴 숨을 내쉬었다.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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