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개헌 물건너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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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뜩이나 혼미하던 개헌정국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라는 돌풍을 만나 말 그대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게 됐읍니다. 도대체 개헌은 되는지, 된다면 언제 어떻게 되는지….
-정부나 민정당 관계자들간에는 요즘 『합의든 합법이든 조기개현은 물건너갔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민정당의 한 소식통은 『고문사건이 없었다면 지금은 개헌안 발의가 됐었을지도 모르고… 야당 설득작업이 수면위로 떠오를 때인데…』라고 하더군요.
-민정당분인사들중에는 『정치는 당분간 사라졌다』는 탄식도 많습니다.
-정부의 고위관계자는 『박군의 추도식이 벌어지는 2월7일까지는 정치상황이 전혀 조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더군요.
-민정당측의 시각도 마찬가지인데 『고문문제를 갖고서는 신민당이 대화할 상대도 안되고, 또 대화에 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권은 대체로 2월중순까지는 정치적 수습노력은 하기어렵다는 판단아래 인권상황개선을 위한 자체노력을 가시화하면서 국면전환의 계기를 모색한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후 분위기를 보아 다시 인권특위를 앞세워 3월 국회를 열고 야당과의 대화도 재개해보자는 생각을 갖고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면전환을 위해 당정개편의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란 얘기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죠.
-당정개편의 시기는 국회직의 임기가 끝나는 5월로 일단 예상됐었지만 고문사건에서 빨리 벗어나고 분위기쇄신을 위해 한달 또는 그이상 앞당길 수도 있는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이번 사건으로 여권이 야당의원들의 동조를 얻어 합법개헌을 한다는 계획조차 상당기간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고 보여집니다.
-여권은 개헌이 금년상반기까지는 끌나야 내년2월까지의 정치일정이 무리없이 진행될 수 있다고 해왔읍니다만 요즘과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6월까지 개헌이 될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권일각에서는 합법개헌을해봤자 정통성시비, 선거부담등 전혀 이로울 게 없으니 그대신 개헌안을 발의만 해놓고 국회가 가결을 시키든지 부결읕 시키든지 알아서 처리토록 하자는 의견도 있어요.
-그것은 부결되면 부결되는대로 여권에 카드가 생긴다는 얘기인데 실현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여겨집니다.
-어떤 민정당인사는 「역수」의 논리라는 것을 말하더군요. 즉 구속자도 상당수 풀고, 학원소요도 종전처럼 그렇게 철저히 진압하지 않는등 부드러운 방법을 쓰면 사회혼란과 불안이 일어날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고문사건에 대한 분노에서 안정희구쪽으로 국면이 전환되고 그때 개헌협상에 들어간다는거죠.
-매우 위험한 방법이군요.
-합법개헌도 어렵다는 분위기가 되니까 민정당에서는 『현행헌법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자주 나와요.
-그러나 그것은 아직은『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성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현행헌법으로 한다면 가령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 야권이 후보를 내겠습니까. 또 여권이라도 「혼자 나가서 당선되는」선거를 하기는 어렵다고 봐야죠.
-합법개헌도 어렵고, 현행헌법도 안되면 그럼 정치위기 국면이 온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중대결단」의 가능성도 높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결코 배제할 수 없다고 봐요. 개헌도 안되고 현행헌법도 안되면 무슨 수가 있겠읍니까. 요즘 와서는 다시 89년 개헌논의도 나오고 있잖아요.
-신민당은 뜻밖의 고문사건으로 공세의 입장에 섰지만 실은 내부적으로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민당의 한 중진은 「끌려가는 국면」이라고 솔직히 털어놓더군요.
「사태전개의 장」을 재야·종교계·운동권등이 장악함으로써 신민당이 주도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이들에게 끌려가는 형편이라는거죠.
-신민당내에도 박군 사건을 보는 시각에는 몇갈래가 있읍니다.
하나는 인권문제의 전반적현실을 들춰내면서 국민적 분노의 열기를 고조시켜 범국민운동으로 조직화해가는 한편 정부·여당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죄어야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비교적 온건한 세력들로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민당이 정치적 역할을 확대해가며 가급적 문제해결의 활로를 정치권으로 몰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장외로 몰기보다는 장내로 끌어들여 해결하는 것이 물론 바람직한데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지난번 임시국회에서는 민정당이 너무 인색했고 이에따라 정치권에서의 카타르시스는 어렵게 됐다는 지적도 있읍니다.
-결국 신민당은 이민우총재, 양 김씨, 재야인사가 망라된 범국민투쟁기구적 성격의 추도준비위원회가 주관하는 2월7일의 추도식, 3월3일의 49재, 또 그사이의 폭로·규탄대회등으로 계속 분위기를 끌어가 봄철 운동권의 움직임으로 연결해 나간다는 전략에 「어쩔 수 없이」의견의 일치를 보게된 셈입니다.
-그러나 두 김씨진영 모두 이번 사태가 전적으로 장외화되어가는 데는 조심스러운 입장인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신민당의 역할축소가 불가피하게 되므로 적당한 선에서 정국주도의 계기가 신민당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는 계산입니다. 그리고 그 계기는 광범한 의미의 「대화」일 것이라고 하더군요.
-신민당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이 개헌협상에서의 고지확보, 혹은 여야관계에 있어서의 결정적 승기포착등 어디까지나 체제내적 성격인이상 강경한 재야의 시국관과는 어차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양자간 제휴관계에는 한계와 불안정성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신민당안에도 깔려있읍니다.
-군중대회로 정권교체를 할수있다고 믿는 세력이 아니라면 이번 사태의 전개가 통제불가능의 지경으로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우려하고 불안해 하기는 신민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신민당은 여권에 의한「판쓸이」 못지않게 재야나 운동권의 「판쓸이」가 초래되는 상황도 바람직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고문파동이 계속확대, 증폭돼서는 여도 야도, 나아가 국민전체에게 손실을 주게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으로 조성된 불안국면이 무한정 방치될수는 없다고 봅니다.
-정부·여당은 분위기를 정말 일신할만한 민주화조치를 취해야 어느정도 국민 신뢰기반을 얻게되고 그래야 협상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정부·여당은 인사개편, 경찰등 수사기관의 쇄신등을 생각하는 눈치인데 그런 조치만으로는 국면전환이 어렵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읍니다. 과감하고 강도높은, 적어도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서야 뭔가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국회내에 인권특위를 구성해야할 만큼의 인권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한 이상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차원에서 국민의 피부에 닿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할 것입니다.
-야권내의 과격세력이 확산되지 않고 온건파가 명분을 얻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겠죠.
-중대결단이라는 것도 국민적 납득하에 나올 수 있는 것이지 잘못을 저질러놓고 세불리하다고 평지돌출식으로 쓸수는 없는 것 아니겠읍니까.
-야당도 재야에 업혀 정부·여당만 밀어 붙이는 식이어서는 곤란하지요. 재야의 주도로 이뤄지는 사태의 전개를 원치 않는다면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수렴, 극복할 수 있는 길목을 향해 몰아가야 합니다. <정리=안희창·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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