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하게 근원을 바로 잡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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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후 이 땅에서 고문을 영구히 추방하자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고문이 잔혹한 비인간적 야만행위이고 인간이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행위라고 분개도 했고 고문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표출됐다.
해방 후 공권력에 의한 별의별 고문이 자행되어 왔지만 이번처럼 국민 모두가 비통해하고 울분을 토하고 절규한 예는 드물었다.
이민우 신민당총재도 어제 기자회견에서 임장동행 불응 국민운동을 제의했고, 박군 사건으로 소집된 임시국회에서도·인권문제 전반에 걸친 신랄한 대정부 질의를 시작했다. 또 이번 사건의 실체와 고문의 발본색원을 위해 고문조사 국정조사권의 발동도 야당에 의해 제기됐다.
이 같은 일련의 반응들은 각계 각층을 망라한 온 국민의 공분과 호소의 반영이고 고문의 폐해와 근절의 필요성을 다같이 인식하고 공감한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표출된 각계의 의사는 고문행위를 비분강개하고 관계자를 엄단하고 고문을 뿌리째 없애야한다는 당위성만 강조된 느낌이다.
이 사건을 냉정히 분석하고 고문을 비롯한 고질화된 인권유린 행위가 왜 밤낮없이 일어나며 진정한 대응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진전이 없었다.
물론 고문근절 방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벽한 법적, 제도적 강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나왔었고 제도보다 공권력 행사자들의 결연한 의지와 수사환경과 수사종사자들의 자질향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러나 인권유린이 애시당초 어디에서 출발하고 고문을 낳게하는 독소와 고질을 도려내자면 원초적으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않았던가 싶다.
이런 점에서 대한변협이 경찰관직무집행법부터 개정해 임의동행과 불심검문의 악습을 막자고 건의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박군 사건에서 보았듯이 비극은 이른바 「임의동항」에서 시작됐고「보호조치」로 불법감금과 고문이 가능할 수 있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의거해 경찰이 임의동행을 할 수 있을 경우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어떤 죄를 범했거나 범했다고 의심될만한 상당한 이유」 외에 현장에서 물어보는 것이 당사자에게 「불리」하고 교통에 방해가 된다고 인정될 경우다.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편의를 위해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당사자의 자발적, 적극척 의사에 따라 동행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사기관에 연행 당한 사람치고 자발적, 적극적 동의로 동행한 경우는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의없이 동행아닌 연행은 불법체포이고 「보호조치」는 구금이자 영장없는 불법구속인 셈이다.
경찰이 이 같은 불법체포와 구속을 식은 죽 먹듯이 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의 법의식의 결여와 인권에 대한 자구정신이 희박한데도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은 대한변협의 건의가 말해주듯 경찰이 이 법을 악용할 수 있는 코걸이식의 독소조항의 적용한계를 정확히 해주는 구체적인 절차조항이 없어서다.
대한변협은 이 법의 탈법과 오해의 여지를 낳는 법의 개정과 아울러 고문신고센터의 설치, 수사때부터 변호인 입회권 보장신설 등도 건의했거니와 이제는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지혜를 모아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이것이 박군의 애절한 죽음에 보답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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