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백두산 - 여명(제1장) - 하늘과 대지(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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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하호 마을과 다른 곳이 있다구요. 모두 다 똑같이 사는 동네가 정말 이 세상에 있어요?
여자 아이는 덕이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는지 그의 말을 되풀이 하여 물었다. 덕이는 아이가 울음을 그친것만 대견하여 계속 떠들었다.
우리는 부족은 다르지만 다 같은 밝종족이란다. 하늘의 자손들이지. 이렇게 상호 하호를 정하고 일을 시키고 수확된 곡식을 빼앗아 가고 서로 죽이고 하는짓은 하늘의 뜻이 아니야.
죽어서 하늘의 다리를 타고 오르면 하늘님께 일러 바칠거예요.
그래, 자세히 이르자. 땅 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늘님도 아셔야 된다.
여자 아이는 기분이 훨씬 나아졌는지 다시는 울지 않았다. 덕이는 문가로 다가서서 통나무 간살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집 앞에 창을 빗겨 든 감사 두사람이 지켜 서 있었다.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덕이는다시 벽쪽으로 돌아가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어라.
빗장을 빼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빠끔히 열렸다. 군사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덕이의 양겨드랑이를 끼고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를 처넣었던 십장이 버티고 섰다가 물었다.
네가 경구의 덕이라는 놈이냐?
예.
십장은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걸어갔고 군사들이 덕이의 등을 떠밀었다. 십장은 마당을 건너 통나무 기둥에 돌과 흙벽으로 지은 커다란 집으로 덕이를 데려갔다. 관솔불이 타올라 집안은 훤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방안에 평상이 놓였고 바닥에는 잔 돌멩이가 단단한 땅에 깔려있었다. 평상 위에는 번쩍이는 구리 장식이 붙은 두건을 쓴 자가 앉아 있었다.
꿇어 앉아. 박사님이시다.
십장이 은근히 꾸짖었다. 덕이는 얼른 무릎을 굽히고 평상 앞에 앉았다. 박사는 얼굴이 창백하고 뱀눈이 날카로운 모습이었는데 덕이를 바라볼제 더욱 눈빛이 차가와지는듯 하였다.
너는 동호에서 팔려 왔느냐?
예, 지난 가을에 이리로 왔읍니다.
청구족이라지? 어디쯤인가?
갈래강에 우리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호족의 습격으로 없어졌읍니다.
큰읍에는 가보지 못했군. 하고나서 그가 십장에게 일렀다.
들어오라고 하여라.
십장이 나가더니 잠시후에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바로 다루였다. 다루는 깨끗한 베옷을 입었고 작은 구리 장식이 박힌 띠를 매고 있었다.
이 아이가 자네가 찾던 아이인가?
다루는 덕이를 보고 웃어 보이더니 당당하게 말하였다.
예,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미 장정입니다. 제가 동호의 마을에서 분명히 보았지만 이 사람은 벌써 결혼하여 아내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박사 상호는 화를 벌컥 내면서 평상을 한손으로 내리쳤다.
그런데 어깨서 거짓말을 하였는가. 봄 제사가 우리 읍에서 얼마나 중요한 행사라는 걸 모르는가. 여자를 가까이 했던 몸으로 동남이 되어 굿판의 제물로 올랐다가는 흉년은 물론이요 온 읍민이 돌림병으로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
다루가 침착하게 말하였다. 거짓말을 한것이 아니라 그는 이런 풍습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온지 몇달 차지도 않았읍니다.
그러한가?
박사가 덕이에게 물었다.
너희 고장에서는 풍년을 비는봄 제사를 하지 않는가?
제사는 합니다만 소나 돼지를 희생으로 바칠지언정 사람을 쓰지는 않습니다.
덕이는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러나 박사는 입가에 경멸의 빛을 가득히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청구의 변방이라면 그들은 야만인이다. 우리 검님께서는 불기에 닿은 사람의 음식을 좋아하지 않느니라. 가축은 또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고, 너희들 같은 하호들 보다 귀중하다. 또한 제물로 죽게되면 검님의 나라로 가서 땅의 정기를 북돋는 일을 하게 되니 하호의 천한 몸을 벗어나는 일이다.
다루가 말하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사람은 하호를 벗어나 검님의 땅으로 돌아가려고 동남을 자처했던 것입니다.
박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나이가 찼고 아내를 가졌던 몸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 자도 구리를 다룰줄 아는가? 그럼요, 구리도 다룰줄 알고 그는 무엇 보다도 훌륭한 전사입니다. 그는 청구족 호장의 아들이었읍니다.
박사는 잠깐 생각해 보더니 덕이에게 물었다.
너를 제물로 쓰지는 않겠다. 그러나 너는 거짓말을 하였으니 벌써 살아남지 못할 죄를 저지른 것이다. 만약 너를 살려준다면 우리 예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겠느냐?
덕이는 두려워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청구족입니다. 예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한님의 자손인밝종족입니다. 부족과 부족끼리 갈라져서 서로 싸우는 동안에 다른 종족들은 우리 보다 강성해져서 반드시 우리 종족을 저들의 하호 노비로 떨어뜨리고 말것입니다. 만약 내게 힘이 있다면 동호를 초원 멀리 내쫓고 각 부족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도록 젊은 전사들을 선비의 무리로 결집시키려 애쓰겠읍니다.
박사는 어이가 없는지 픽 하고 냉소를 터뜨렸다.
청구가 어찌 그런 일을 할수있단 말인가. 더구나 너는 우리의 하호다. 몸값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서 예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런 허황한 소리만 하는가. 너에게 십장을 주겠다. 싸움터에 나가서 전공을 세워라. 공이 없으면 돌아오는 즉시 너를 산채로 땅에다 묻겠다.
박사가 십장에게 일렀다.
백장에게 다른 동남을 찾아오도록 이르고 이 자에게는 중군의 십장을 주도록 일러라.
박사가 손짓하여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였고 십장과 다루와 덕이는 박사의 처소에서 나왔다.
운이 좋은 녀석이군.
십장이 덕이를 데리고 나오며 불쾌한듯이 중얼거렸다.
인제 성내에 살게 되었으니 자주 만나게 될게다. 너는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반드시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룰거야.
다루가 덕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대장간 일이 끝난 뒤에 너를찾아가겠다.
고맙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덕이는 십장을 따라서 성내의 중군이 머무는 막사로 갔다. 백장은 십장의 말을 듣더니 덕이에게 물었다.
전에 무엇을 배웠느냐?
말타기 활쏘기는 물론이요 여기 와서는 갈고리 창쓰기를 배웠읍니다.
말을 잘 타는가?
저는 갈래강에 살았습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어려서부터 모두 자기 말을 가지게 되고 어른이 되려면 혼자서 광야와 산에서 사는 수련도 거쳐야만 합니다.
좋다. 너는 중군 기병의 십장으로 내 휘하에 들어온다. 서북쪽 변방 마을이 유목 부족의 침탈을 받아 땅을 많이 잃었다. 우리는 뜨거운 달이 오기 전에 그 곳을 되찾아야 한다. 내일부터 기병 습진의 조련을 받아라.
덕이는 기병에 편입되었고 전사자가 남긴 말도 받았다. 백장들과 장수의 말은 한협마와 같은 키 크고 우람한 명마였지만 십장 이하 병사들의 말은 작고 날랜 과하마였다. 기병들은 갑주를 입지 않았다. 북방 유목 부족들처럼 홑옷에 가죽 방패와 창과 활, 그리고 동검을 찼다. 그리고 신발은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가죽 화(화) 였다. 그들 중군의 깃발은 땅과 같은 색인 황색이었고 동서남북 하호군이 청백홍흑의 군기를 가지고 있었다. 덕이는 기병 열 사람을 통솔하는 십장이었지만, 청구의 광야에서 달리던 재주로 그 기량은 장수에 뒤지지 않았다. 덕이는 조련이 끝난 뒤에 다루의 대장간으로 가서 그를 만나곤 하였다. 다루는 덕이가 봄 제사의 희생으로 동남이 되어 끌려가는 꼴을 보고 박사에게 가서 탄원하였던 터였다. 다루는 구리를 다루는 기술자였으므로 사제자인 박사와는 서로 밀접한 관계였던 것이다. 덕이는 뜨거운 달이 될때까지 모든 예맥식의 습진 조련을 끝마쳤다.
예와 맥의 연합군사들은 초여름에 거병하여 난하의 상류 승덕(승덕)땅에 진출하였으니 이것은 난하의 좋은 유역과 예의 대읍인 평강을 엿보는 요충지인 셈이었다.
기병으로 중군을 삼고 동서남북에 각각 보병과 전차대와 사수군을 두어 밀려드는 적의 기병을 활로 제어하는 한편 기병으로 적진을 돌파하고 전차로 진을 무너뜨린 뒤에 보병의 살진이 에워싸는 것이 평원에서 벌이는 법식이었다.
기병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여 날쌔게 적진의 일선을 가르고 들어가 적의 지휘부서와 중군을 교란시키고 전차는각대의 철통같은 진을 흩어지게 만들며 보병의 진로를 터주는 것이었다. 예와 맥의 연합군은 여러 읍에서 차출된 만여병력이었다. 예 맥은 싸음하는 법이나 관습이 동호와 비슷하였으며 그들의 전술을 잘 알았고 무엇보다도 그 무기가 다른 종족들에 비하여 특이하였다. 예 맥의 큰 활은 사정거리가 길고 정확하였고 살촉에는 독을 발라서 맞기만 하면 인마가 치명상을 입는 것이었다.
기병공격의 제일판은 창으로 적을 찌르고 나서 동검으로 진의주변으로 몰려드는 보병을 살육하고 퇴각하면서 활을 쓰는 순서였다. 예 맥족의 말타는 재간은 인근 부족들 사이에 뛰어난 바가 있었다. 말등에 곧추서서 한손으로 고삐를 잡은 채 창을 휘두르기, 안장을 쥐고 두 발을 땅에 대며 매달려 달리기, 그대로 말등을 뛰어넘어 반대편에 매달려 달리기, 한손으로 말안의 안장을 끌어안고 거꾸로 물구나무를 섰다가 달리는 방향의 뒤로 돌아앉기, 한손으로 말 안장을 잡은 채 땅에다 바른손을 댈듯이 거꾸로 매달러가기, 안장에 앉은 채로 오금으로 말의 어깨를 죄고 뒤로 누워서 머리를 말꽁지에 대기 같은것들이 예 맥 기범들의 말타는 재간이었다. 이는 활이나 창의 공격을 피하는 선봉기병들의 중요한 습련 내용이었다.
난하상류는 승덕인근에서 세갈래로 나누어지고 다시 북으로 초원지대까지 닿아 네갈래로 갈라진다. 대초원과 늪지가 승덕 북방으로 펼쳐져 있었으나 유목부족들로서는 승덕을 점령하여야만 난하 이동의 기름진 평야를 공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때에 따라서 동호는 예 맥과 교역하였으나 생활조건이 나빠지면 서북초원지대의 사나운 산융족이나 다른 유목부족들과 연합하여 그들 침략군의 안내자로 변하기도 하였다. 또는 반대로 동호의 다른 부족들은 예와 맥의 북방에 정착하는 대신 그들의 군대와 협력하여 새로운 유목부족의 내습을 방어해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덕이는 예의 열읍에서 나온 큰한과 천호장들이 진을 친 중군의 선봉에서 적의 대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치와 창검이 하늘에 가득한데 전차대는 뒷전에서 천천히 따라왔고 사수대가 좌우로 뛰쳐나왔다. 북소리가 들리더니 맞은편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적병들이 짓쳐나왔다.
유목민들은 거의가 기병인 셈이었다. 그들은 말을 달려 일파 이파 삼파로써 물결처럼 휩쓸고 나서 그대로 후진으로 남아 있던 보병이 쏟아져 들어오는 식이었다. 덕이네 진에서도 북소리가 들리고 나서 사수대가 짓쳐들어오는 적을 향하여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겨울날의 찬바람 소리처럼 들려왔다.
말에서 떨어지는 자, 말을 탄채로 함께 그 자리에 거꾸러지는 자, 화살을 맞고 말 안장에 늘어지는 자 따위가 똑똑히 보였다. 좌우를 무너뜨리고 전방으로 예리하게 뚫고 들어온 적의 기법에 맞서서 덕이네 중군이 나섰다. 뿔나팔소리와 함께 덕이는 백장의 구령소리를 듣고 말을 달렸다. 말은 네 굽을 차면서 달려나갔다. 덕이는 창을 두손으로 겨누어잡고서 허벅지로 안장을 꼭 끼고 몸을 숙인채 달렸다. 적의 기병과 지나치면서는 그들을 그냥 보내주면서 적의 창을 막거나 퉁겨내기만 했다. 그들은 우선 적의 기범진을 뚫고 배후에 남은 보병을 시살해야하는 것이다. 적의 일파가 지나가고 사수대의 격걱이 멈추면서 전차대가 달려나갔다. 전차는 두바퀴의 수레였는데 말 한쌍이 끌고 갔다. 양 옆으로 구리로 장식한 나무방패를 세우고 수레 위에는 마부와 장창수가 탔다.
화살에 살아남아 계속 밀려드는 적군의 공격파를 흐트러뜨리면서 전차대가 기병의 뒤를 엄호했고 다시 그 남은 병력은 후미의 아군보법들이 밀집된 갈고리창과 칼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덕이는 적의 일선과 이선을 뚫고 후진속으로 뛰어드는 대열에 끼어있었다. 덕이는 몸이 가볍고 과하마가 날래어 적의 공격을 피해나갈 수가 있었다. 그 둘은 보병둘의 진 가운데 덮치고 들어갔다. 우선 창으로 찌르고 던져서 적의 소지휘자를 쓰러뜨리고 동검을 빼어 주위로 몰려드는 보병들을 물리쳤다. 유목부족의 보병들은 돌과 뼈로 만든 창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한 돌을 맨 가죽끈을 던져서 마상의 기병을 끌어내리기도 하였다.
덕이는 동검을 빼어들고 그들을 좌우로 베고 찌르면서 헤쳐나갔다. 문득 관모뒤에 화려한 깃을 꽂은 지휘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장창을 휘두르면서 덕이를 맞았다. 상대편은 땅에 서 있었으나 옹호해줄 창수들이 주위에 많았다.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창날이 일시에 에워싸며 앞으로 솟았고 덕이는 잽싸게 말을 켜커 살진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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