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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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탈리아 형법학자 「벡카리아」의 명저 『범죄와 형벌』에 나오는 얘기다.
『…마치 진실이 한 사나이의 근육이나 힘줄 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고통이 진실의 도가니가 되길 요구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경멸될 것이다.』 요즘 얘기가 아니다. 벌써 2백여년전인 1764년에 이런 책이 저술되었다.
「근육이나 힘줄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찾아내려면 그것을 비틀어 짜거나 짓누르거나 파열하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서양엔 그런 도구들이 많이 있었다. 런던의 런던탑에선 사람의 사지를 사방에서 묶어놓고 제각각 잡아당기는 고문이 있었다. 밧줄을 통나무에 묶어놓고 수레바퀴 돌리듯 했다. 16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역시 16세기 프랑스에선 사람을 공중에 매달고 어깨에 밧줄을 걸어 도르래를 통해 끌어당겼다. 그사람의 발폭엔 무쇳 덩어리가 매달려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고문이 있었다. 10세기 전후 고려시대엔 당제를 따라 진술이 분명치 않거나 실토자복(실토자복)하지 않으면 고략(고략)했다. 그러나 매를 때리는데 3회에 한정했고, 한번 그런 경을 치고나서 20일이 지나지 않으면 다시 매를 들수 없었다.
고문치고는 인정미가 있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고문은 명률에 준했다. 『경국대전』(세조)을 보면 몽둥이(신장)는 아예 규정으로 크기가 정해져 있었다. 길이가 3척3촌(1m정도), 윗부분이 1척3촌, 굵기가 7분, 아랫부분이 2척, 넓이가 8분, 두께가 2분.
매를 맞는 신체의 부위도 한정되어 있었다. 엉덩이 아래를 치되 허리는 안되고, 한번 몽둥이를 들면 30회를 넘을수 없었다.
그밖에 특별 고문 수단이 몇가지 더 있었다. 규정대로라면 견딜만한 고문들이었다. 그나마 세종, 중종, 영조는 이런 저런 고문들을 금했다.
어디로 보나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극악스럽진 않았다.
그러나 고문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은 잔인하고 영악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할 때였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몸서리나는 기법들이 개발되고 사용되었다. 배신과 복종을 강요하는 자백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인권, 인권하는 나라에서 여전히「고문」이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분노를 넘어 슬픈 일이다. 「선진조국」은 먼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옆에도 있을수 있는데, 현실은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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