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식과 산현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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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길을 걸어가다 보니 갑자기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거기서 내려다보았더니 수m 아래쪽에 요동의 안뜰이 있었다. 정방형 안뜰 사방의 벽에 둥근 아치형 출입구를 낸 방들이 있다. 취재팀이 서있는 길 밑에도 사람들이 사는 방이 있었다. 길에는 트랙터·말이 끄는 짐수레가 빈번히 왕래한다. <옥상에 마차가 지나가는…>이라고 읊은 요동 마을의 정경.
또 하나의 산현식은 황토의 비탈에 직접 횡혈을 파서 만드는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 산현식의 경우는 배후가 산이고 앞은 틔어 있다. 대개는 남향으로 만들어져 햇볕이 잘들게 했다. 황토고원의 중심인 섬서성북부(합북)에서는 이러한 산현식요동이주류다.
이 산현식에도 3종류가 있다. 황토의 절벽에 굴을 파고 출입구와 창을 낸 토요, 돌을 쌓아서 만드는 석요, 황토로 구운 벽돌을 사용한 전요(전요)다.
내구성은 토요보다 석요·전요가 훨씬 낫다. 하지만 토요도 지붕이나 벽의 황토는 단단해서 연간 강수량 4백㎜ 내외의 건조한 기후인 황토고원의 조건하에서는 보통 건축물보다 내구연수는상당히 길다. 천년이상이나 된 토요로 지금껏 보존되는 것도 있다.
수목이 드문 황토지대에서 가장 손쉬운 황토를 건축재료로 하여 간단히 지어지는 토요를 최근에 자재절감을 목적으로한 생토건축의 모델로서 중공의 건축학회는 물론 세계의 건축관계자들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요동주택은 풍토에 적합한 이상적인 주거형태로 보이나 실제로 사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예를 둘면 채광은 앞폭에서만 가능하여 방 안은 낮에도 컴컴하다. 게다가 건조지대라지만 우계에는 흙이 습기를 머금어 방 전체가 눅눅하다든지-.
그래서 최근에는 평지에 돌을 쌓아서 짓는 개량형 석요가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건축비가 비싸서 토요의 갑절은 든다. 소득이 낮은 농가가 많은 협북지방에서는 큰 부담이 된다.
중공정부수립 이전의 중국농촌이 어디나 그랬듯이 협북에도 대지주가 많았다. 그 지주의 집도 여기서는 요동식이었다.
그 하나를 미지현 유가향에서 찾아보았다. 청조말기에 성단위의 과거인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된 강요조라는 지주의 저택.
대문에는 <대악병번>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고 20m이상이나 되는 성벽이 솟아 있다. 과거의 대지주가 지녔던 재력이 상상된다. 문읕 들어서서 석조터널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자 청색·홍색으로 채색된 문이 있다. 거기에는 <무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문을 들어서자 안뜰이 있고 그3면을 주거처인 요동이 둘러싸고 있다.
과거에 2백㏊의 토지를 소유했던 강일가가 살던 이 지주저택에는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 강요조의 손자인 강유성씨일가는 중앙의 요동 중에서 방셋을 쓰고 있었다. 강씨는 외출중이고 71세의 노파(부인)가 맞아 주었다. 방 구석에 석관같은 것이 있었다. <양식포자 (식량을담는 뒤주)>라면서 노파가 돌뚜겅을 열어보였다. 절반쯤 조(속)가 당겨 있다. 강씨도 지금은 농민이다.
벽에 걸린 도구들, 갱(온돌)위에 아무렇게나 딜려있는 면직옷가지들하며 풍요로용을 느끼게하는 것이라곤 없었다. 다만 중앙에 있는 방에 놓인 평궤(평궤)만이 질박한 방에 어울리지않을만큼 훌륭하고 크다. 옛날에는 금고로 쓰였다는 이 궤짝에는 구리로 된 손잡이가 붙어있고 열면 삐거덕 소리를 냈다. 이것만이 왕년의 대지주가 지녔던 권세를 되돌아보게 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또 하나, 같은 현의 양가구라는 마을의 옛 지주집을 취재했다. 지주의 집은 마을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있었다. <신원-민국이십팔년>이라 새긴 돌문이 있다. 문을 들어서자 국민학교 운동장만한 넓은 뜰이 있고 몇 그루의 대추나무가 시든 가지를 펼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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