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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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운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버린다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희부연 종이 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샘물 정히 떠붓는 안스러운 마음결 한해라 기리운 정을 뫃고 쌓아 흰 그릇에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김영랑의 시 『제야』의 한 구절이다.
제야는 이처럼 아쉬움을 남기고 묵묵히 사라져 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안스러움 속에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간절한 기원도 있다.
우리 세시풍속에는 이날을 제석이라고도 한다. 민간에서는 1년 중에 있었던 모든 거래의 종결을 짓는다. 그래서 남에게 받을 빚이 있거나 외상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가서 갚거나 또 받는다.
만일 이날 자정이 넘도록 받지 못한 빚은 대보름날(1월15일)까지 독촉을 못한다.
또 이날 인가에서는 다락·마루·방·부엌 등 구석구석에 초롱불을 밝혀 놓고 잠을 자지 않는다. 이것을 수세라 했다. 그리고 집안 어른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묵은 세배(구 세배)다.
『제야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세어진다』는 속담을 믿고 아이들도 설빔하는 어른 옆에서 방을 꼬박 새웠다.
한편 대궐에서는 제야 전부터 대포를 쏘았는데, 이를 연종포라 했다. 화전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은 역질과 귀신을 쫓는다는 옛 풍습의 하나였다.
서양에서는 제야를 실베스터라고 한다. 원래 「실베스터」는 335년에 사망한 교황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12월 31일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서양의 연말 풍습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강난감 로키트(폭죽)를 밤하늘에 쏘아 올리는 놀이다. 그러나 이 폭죽놀이는 8백여년전 중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이 불꽃놀이는 12월 31일 밤부터 1월1일 새벽까지 이어지는데 독일에서는 여기에 드는 비용이 매년 1억 마르크가 넘는다.
귀를 멍멍하게 할만큼 굉음을 내는 이 시끄러운 놀이는 악귀를 몰아낸다는 옛 풍습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날의 또 다른 풍습은 펀치(오색주)를 마시거나 샴페인 비슷한 섹트라는 술을 터뜨리며 『끝이 좋으면 만사가 좋다』는 말을 주고받는다. 이런 풍습 가운데 가장 흥미있는 것은「납물놀이」로 새해 운세를 보는 것. 납을 녹인 다음 물을 부어 굳게 해서 그 모양에 따라 운세를 점친다.
특히 미혼여성들에게는 그 모양이 바늘 같으면 신랑감이 재봉사이고, 책 모양이면 선생님, 탑 모양이면 도시로 시집간다는 뜻이다.
이처럼 동과 서의 풍속은 달라도 새해를 맞는 경건함은 모두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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